영화 <덕혜옹주>를 보았다. 역시 허진호 감독의 영화 답게 묵직하고도 클래식한 연출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런 미학적 평가 이전에 나는 이 영화가 불편했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말하겠다.
내 전공은 역사다. 내가 배운 바, 혹은 내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나는 대한제국을 미화하거나 옹호하는 모든 시도를 반대한다. 대한제국은 국권을 일본에 넘긴 매우 무능력한 봉건 왕조였을 뿐이다. 영화가 그려낸, '최후의 황녀'라는 이름으로 수식된 덕혜옹주의 굴곡진 삶 속에는 그런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 있지 않다.
역사에 가정이란 건 없지만, 만약 대한제국이 서양처럼 부르조아 혁명에 의해 공화정으로 바뀌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랬어도 덕혜옹주의 삶이 허망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건 모든 봉건 왕조의 비극이다. 그걸 일제 강점기라는 기왕의 시대적 비극을 볼모 삼아 재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대한제국은 열강에 포위된 조선왕조 최후의 발악이었다. 그리고 상해에 거점을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 이후에 왕정복고가 아닌, 공화정을 추구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진실이다. 덕혜옹주는 그 역사적 격랑에 휩싸인 비극적 개인, 그냥 그 개인일 뿐이다.
그런데, 그 역사적 격랑에 휩싸여 절망을 맞은 개인들은 그녀 말고도 무수히 많다. 무수히 무수히 많다. 일제 말기에 징병당해 필리핀에서 포병으로 싸운 내 아버지의 이야기도 한편의 영화이지만, 영화로 만들어질 수 없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 영화로 만들어지려면 국권을 빼앗긴 허수아비 황제(고종)가 그 사이에 궁궐 나인과 섹스를 해 태어난 딸쯤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슬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