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부당거래'의 정면돌파와 타협

cinemAgora 2010. 11. 13. 16:36
*스포일러 많습니다.


<부당거래>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영화다. 자타가 공인하는 '시네마 키드' 류승완이 <피도 눈물도 없이>(2002)의 상업적 실패를 딛고 다시 누아르적 감수성으로 돌아왔다는 점이 그렇고,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권력형 부조리에 매운 펀치를 날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흔히들 말하는 흥행 요소라는 측면에서 <부당거래>의 선택은 사실상 미지수에 가까웠다. 일단 두 주인공이 '비리'로 따지자면 오십보 백보의 악당이다. '정의의 승리' 혹은 '악당의 패망'이라는, 상업영화의 전형적 플롯을 가지고 진행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내적으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줄만한 지점을 끄집어내기가 힘든 작품이라는 얘기다.

<부당거래>는 대신, 두 악당 간의 대결 구도 안에 매우 현실적인 개연성이 넘치는 계급 관계를 설정한다. 똑같이 악하더라도, 시스템 안에서 더 큰 권력을 가진 이가 이기게 돼 있다. 종국엔 최악(주양)이 차악(최철기)을 이기는 세상. 차악의 패망이 설령 악당의 패망일지언정, 관객들은 흔쾌히 통쾌함을 얻을 수 없다. 최악이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 응징은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살인의 추억>처럼 말이다.

영화의 완성도와 별도로, 어쩌면 흥행적 미지수로 여겨진 이런 선택이, 결과적으로 흥행 성공으로 이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분석해 보면, 영화와 한국사회의 관계 짓기, 즉 영화가 관객들의 무의식과 만나는 접점이 영화 내적인 논리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양과 최철기는, 철저하게 이해 관계에 의해 움직이면서도, 겉으로만 정의구현을 외치는 권력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동시에 그들은 생존을 위해 원칙을 저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어쩌면 관객 자신이기도 한) 어떤 면에서는 소시민적 캐릭터이다. 그렇다면 <부당거래>는 한편으로 통렬함을, 또 한편으로 현실적 동질감을 이끄는 기묘한 이중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관객들로 하여금 비웃고, 연민하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끄집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화 <부당거래>에서 끝내 동의할 수 없는 설정이 하나 있다. 가짜 범인, 그러니까 '배우'로 조작된 용의자가 사실은 진범이었음을 드러내는 반전 말이다.

이 반전은, 두 주인공이 모두 감정이입이 힘든 악인이라는 부분을 의식한, 그리하여 인물에 대한 거부감을 상쇄시키기 위한, 일종의 급조된 면죄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완전한 부도덕의 시궁창으로 몰아 넣지 않겠다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일말의 동일시나 연민을 이끌어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흥행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현실적 고려. 어쨌든 그 반전만큼은 처음부터 <부당거래>가 꿰뚫고 돌파하려 했던 지점을 스스로 훼손한 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상업영화의 여러 측면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부당거래>도 정면 돌파보다는 슬쩍 우회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영화 속의 주인공들을 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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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류승완이 직접 각본을 써 지난 추석 시즌에 개봉한 <해결사>의 경우에도, 배후의 정치세력간 타협을 두루뭉술하게 비판함으로써, 상투적인, 그러나 비교적 안전한 정치 허무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직설화법이 야기할지도 모를 정치적 논란에 대한 부담감을 벗어던질 수 없다는 것은 류승완 뿐 아니라 한국 대중영화가 아직 넘지 못하는 한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