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영화' 추석에 볼만한 진짜 가족영화
내 어머니는 일찍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세 형제를 키웠다. 그리고 일찍 치매를 얻어 7년간 요양 생활 끝에 지난해 돌아가셨다. 일찍 사회에 진출한 덕에 어머니로부터 생활비 지원의 압박을 받아야 했던 두 누나들은 생전의 어머니를 그리 좋게 말하지 않았다. 누나들의 평가에 따르면 어머니는 한마디로 “모질고 독하고 자식들에게도 그리 살갑지도 않은 분”이었다. 반면에 내겐 유년기의 기억만 남기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호인 중의 호인으로 추억됐다. “항상 인자하고 자상한 분이 모진 어머니를 만나 고생만 하셨다”는 게 누나들의 증언이었다.
실제로 학창 시절 어머니에게 용돈이라도 얻을라치면 온갖 욕을 다 들어야 했던 나로서도 어머니에 대한 누나들의 인색한 평가가 타당하다고 믿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여물고 어머니로부터 이런저런 집안의 내력을 듣고 나니 그 생각이 바뀌었다. 어머니는 평생을 실업자로 전전하신 아버지를 대신해 시장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런 어머니가 강퍅하고 모진 성품을 지니게 되신 게 일견 이해가 됐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그렇게 무능했을까. 들여다보니 거기에도 이유는 있었다. 일제 때 징병을 다녀온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그 지긋지긋한 군대에 다시 들어갔다가 탈영했다. 그 뒤로 그의 삶은 어디도 취직할 수 없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 내세울 것도 없는 내 가족사와 얽힌 이야기를 서두에서부터 주절주절 하는 이유는 가족과 역사가 결코 따로 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가족을 그냥 세상과 격리된 하나의 분절적 단위로 바라보면 그 안에는 분명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 내 누나들의 경우 어머니는 가해자였고, 자식들은 피해자였다. 어머니에겐 아버지가 가해자였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버지에겐 아픈 현대사가 가해자였던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도저히 이해 못할, 결코 용서가 불가능할 것 같은 가족 내의 생채기도 어느덧 이해 영역 안에 들어오게 된다.
박동훈 감독이 연출한 <계몽영화> 역시 이렇게 역사와 가족의 함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더욱 남다른 작품으로 다가왔다. 3대에 걸친 정씨 집안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어떻게 역사가 남긴 상처가 대를 이어 유전되고 또 다른 상처로 재생산되는지를 탁월한 이야기 솜씨로 풀어 헤친다.
1대 정길만은 일제 시대 농민 수탈에 앞장섰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근무한다. 말하자면 그는 친일파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동족의 피를 수탈해야 하는 스스로에게 심한 자책감을 느낀다. 그의 아들 정학송은 한국전쟁을 통과한 뒤 학교 선생님과 결혼해 비교적 유복한 집안의 가장이 된다. 그러나 항상 술에 취해 있고 아이들에겐 독재자로 군림한다. 정학송의 딸 정태선은 남편을 기러기 아빠로 남겨둔 채 아이와 함께 미국에서 생활한다. 정학송의 임종이 다가오자 태선은 급히 귀국하지만 왠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살갑지 않다. 게다가 그녀는 무능해 보이는 남편과도 소원하다.
영화는 정길만이 살았던 1930년대와 정학송이 그의 처가 될 유정을 만나게 되는 1960년대, 그리고 태선에게 유년기의 상처를 입혔던 1980년대와 현재를 오가며 이 가족을 둘러싸고 있던 두터운 치부의 껍질을 하나둘씩 벗겨 나간다.
<계몽영화>의 주요한 영화적 공간은 지금은 방치된, 그러나 정길만이 마련하고 정학송이 가정을 꾸렸으며, 정태선에겐 지옥과도 같았던 서울의 한 양옥집이다. 영화는 이 공간의 과거와 현재를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으면서 상처의 연대기를 구축한다. 그리고 이 집안을 군림해온 이중성의 근원을 파고 들어간다.
1대 정길만의 처지는 어찌 보면 역사가 강요한 이중성이다. 그는 조선인이지만 조선인을 수탈해야 한다. 자주 악몽을 꾸지만 자신에게 보장된 안정으로부터 도망칠 용기가 없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든든한 부를 이어 받은 정학송은, 그가 물려 받은 안정된 삶의 배경에 대한 정당화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친일 행적의 아버지를 인정한 순간, 자신의 근거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방법론은 이 시대의 기득권적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약자를 “빨갱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카라얀을 칭송하고 <실크로드>를 즐겨볼 정도로 문화적인 기품에 집착한다. 그러면서도 가족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전혀 문화적이지 않다. 누구보다 자상한 현모양처인 태선의 어머니는 그런 독재자와도 같은 아버지의 폭력적 언사를 감내하면서도 남편의 출세를 위해 뇌물을 바치고 자식들을 위해 불법 과외를 하는 데 있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딸 정태선은 어떨까. 이 집안의 내력에 깊이 새겨진, 이중성의 유전자는 그녀에게는 어떤 형태로 내재돼 있을까.
역사는 개인에게 쉽게 아물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누군가는 타협하고 누군가는 저항한다 할지라도 역사가 강제하는 거대한 폭압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계몽영화>는 독특하게도, 숱한 굴곡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가 개인에게 남긴 자국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풀어 헤친다. 저항하거나 굴복한 자의 대가가 치명적인 가난의 굴레라면, <계몽영화>의 정씨 집안은 타협의 대가로 중산층의 삶을 얻은 대신, 이중성이라는 저주 역시 유전자에 아로새긴 셈이다. 그것은 시대의 공기와 맞물리며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만, 본의 또는 미필적 고의로 누군가에게 폭력적 상처를 남기는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어떤 가족도 역사와 시대의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계몽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치밀한 시공간의 직조를 통해 웅변한다.
곧 추석이다.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다시 모이고, 온 가족이 마주 앉아 떠들썩해질 시간이다. 일상에 치어 미뤄뒀던 가족애의 소중함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올 추석에는 귀찮다고 자기 방으로 숨지 말고 내 가족의 역사를 탐문해 보면 어떨까.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식민지배기를 어떻게 견뎠으며 전쟁을 어떻게 통과했고, 군사독재기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물어보면 풍성한 이야기의 실타래가 풀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내 가족의 어떤 면모가 비로소 이해 영역 안으로 뛰어 들어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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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NEXT Pl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