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시' 아름다움의 정체에 대하여

cinemAgora 2010. 5. 4. 23:37

이창동의 영화를 보고 나면 늘 가슴이 먹먹해진다. '먹먹하다'는 어휘 외에는 그 느낌을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겠다. 그건 온전히 불편한 것도 아니고, 속시원하게 울어버리면 흩어질 슬픔도 아니다. 그저 아무리 노력해도 내려가지 않고 가슴언저리에 얹히고 마는, 오래가는 체증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소설가에서 영화 감독으로 전향한 데뷔작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오아시스>, 그리고 문화관광부 장관에서 다시 감독으로 돌아와 찍은 <밀양>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시대와 인물, 그리고 관객 사이에 놓인,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던 고리를 들춰내 툭 제시한다.

그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비운의 인물들에 대한 연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편리한 동조도 아닌, 어느 어정쩡한 지점에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도대체 이 정체 모를 먹먹함이 무엇일까 한참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가, 언제나 대중성이라고 불리는 것과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 언제나 위력적인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그의 다섯번째 연출 작품 <시>도, 앞서 말한 먹먹함이라는 감상을 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또 다르다. 현대사에 대한 안타깝고도 매운 직설에서 시작한 이창동의 맥락은 여전하되 그 시선에 어떤 관조가 베어난다. 마치 <밀양>의 마지막 장면에서 뒷마당에 툭 떨어진 은밀한 햇볕으로 일말의 희망을 엿보려는 것처럼, 그는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보이게끔 하는 근원을 탐색하려 드는 것 같다.

이번에는 60대 중반의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그 할머니의 한 때를 쫓아가는 <시>는 이 잔인하고 추레한 현실 위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딸이 떠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와 지방 소도시에서 피폐한 삶을 일구며 사는 미자(윤정희)는, 그래서 이창동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물음을 온전히 배달하는 메신저로 보인다.

시는, 그녀에게 참담한 현실로부터 도망칠 환상 같은 것이다. 발딛고 서 있는 현실은 추레하지만 그녀는 새 소리와 꽃들의 화사함에 자주 취한다. 아니 취하려고 노력한다. 그 자신 알츠하이머 초기에 접어든 가운데 중풍 노인의 간병사로 일하고, 용돈 만 원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삶이지만 옷은 언제나 화려하게 차려 입고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며 시상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구질구질하고도 잔인한 현실이 끝내 시로 도망치려는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 걸까. 미자는 혼란스럽다.

미자의 삶 언저리에 참담한 비극이 평행으로 흐르는 가운데서도 이창동은 의도적으로 드라마의 굴곡을 두지 않는다. <밀양>의 전도연과 달리 <시>의 미자는 절규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나이대에 가장 걸맞게도 그저 슬픔을 꾸역꾸역 삼킬 뿐이다.

게다가 이창동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음악과 미장센의 탐미적 개입이 최대한 절제된 이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눈물 한사발을 쏟고 여전히 감정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애당초 관심이 없어 보인다. 현실을 영화적 박제로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은 종종 관객들에게 외면 받기 십상이지만, 이창동은 도리어 관객이 영화 속의 인물과 영화 밖의 현실을 토대로 감상을 재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영화 속에서 미자와 함께 시 강습을 듣는 한 수강생은 말한다. "괴로운데, 너무 괴로운데 아릅답게 느껴져요." 어쩌면 이 대사 한마디가 <시>를 이해하는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미자의 피폐한 삶 속에 시가 있다. 그녀가 그걸 어떻게 건져올리는지, 그녀가 과연 시를 성취한 건지는 전적으로 관객들이 풀어야할 몫이다.

1994년 작 <만무방> 이후 충무로에 복귀한 60년대 스크린 스타이자 음악가 백건우의 아내 윤정희의 열연은 이 영화 <시>의 아우라를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영화 속 미자는 윤정희의 본명이고, 실제 그녀의 나이 역시 미자와 같은 66세다. 뇌졸증 등으로 투병 생활을 했던 원로 배우 김희라가 노쇠한 모습 그대로 출연한 것 역시 역설적으로 '아름답다'.

5월 13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