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비처럼' 영화적 서사전략이 안보인다
추석 대목을 노리고 개봉한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며 모처럼 실소를 흘렸다. 대개의 야심 넘치는 작품이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욕심이 지나친 흔적이 역력해 보였기 때문이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알려져 있다시피, 야설록의 무협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다. 원작이야 무협에 방점을 찍은 터이니, 이것을 영화로 옮겨온다 했을 때는, 그에 맞는 영화적 전략을 세워야 하는 게 지당할 것이다. 그러나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원작에 대한 과도한 애정 때문인지 몰라도, 아무리 팩션 시대극으로 바라본다 해도 이해가 안될 설정을 그대로 밀어 붙이는 뚝심을 선보인다.
팩션은,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가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증된 역사적 사실, 그러니까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전후 관계와 사실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세종 대를 그리면서 당시 왕이 정조였다고 우기면 안 된다는 얘기다. 팩션은 알려져 있는 ‘팩트’ 사이에 난 틈새를 상상력에 의해 고안된 ‘픽션’으로 메움으로써 ‘당시에 아마 이런 사람이 이런 일을 했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드라마를 추출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나오고 있는 한국의 팩션 영화들은, 관객들의 말초적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킨다는 명분으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윤색이나 왜곡도 서슴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 정부도 아니고, 뜬금없이 대한제국에서 찾아, 약소국 콤플렉스를 배설했던 <한반도>가 그랬고, 세종대의 신무기를 모티브 삼아 조선을 일거에 동아시아 패권국가로 탈바꿈시킨, 초등 역사 수업적 가정법을 쓴 <신기전>이 그랬다. 차원은 조금 다르지만, <불꽃처럼 나비처럼> 역시 왜곡된 팩션 시대극이라는 점에선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사실 나는 문화계에서 명성황후를 낭만적으로 영웅시하는 걸 흔쾌하게 바라보지 않는 입장이다. 그가 나중에 국권을 강탈한 일본에 의해 시해됐다는 이유로, 무슨 대단한 애국지사인양 평가하는 것 같은데, 그 역시 청과 러시아 등의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보위하려 했던, 스러져 가는 봉건 왕조의 복무자였을 뿐이다. 어쨌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견이 있으니 명성황후를 아름답고도 가련한 여인으로 그린 영화의 설정은 일단 용인하기로 하자.
이런 점에서 민자영, 또는 명성황후의 숨겨진 사랑이라는 설정 역시 팩션이라는 장르적 특수성 안에서 용인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용인될 수 있는 그 하나의 설정을 위해 영화는 역사적 상황을 입맛에 맞게 짜맞추는 데 지나치게 과감하다.
호위 무사 무명과의 로맨스를 강조하기 위해, 대원군과의 갈등의 서사가 뒤로 밀리다 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는 임오군란(1882)으로부터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로부터 목숨을 잃게 되는 을미사변(1895)까지의 지난한 권력 쟁투를 마치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인 것처럼 속전속결로 펼쳐 보인다. 그리고 시종일관 명성황후를 대원군의 핍박을 온몸으로 받아 안는 가련한 피해자로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실제 그녀는 대원군을 몰아내고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했다.)
임오군란은 이미 탄핵으로 실권을 잃었던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된 사건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미 그가 정치적 실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도피했던 명성황후를 도와 그를 다시 복귀시키는 데 일조한 건 청나라 군대였다. 영화는 이를 우리의 주인공 무명으로 대치한다. 그래서 대원군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 것도 청나라 군사가 아닌 무명이다. 그것도 홀로!
청을 등에 업은 명성황후의 반격으로 정치적 실권을 잃은데다 청에 유폐됐던 대원군이 어떻게 군대를 이끌어 경복궁을 공격하러 오는지 이해할 수 없을 뿐 더러, 자신의 무사에게 “가서 며느리를 구하라”라고 명하는 장면 역시 실소를 머금게 한다. 일본 낭인 왈, “늙은 여우”, 시해 당시 44살의 중년이었던 명성황후는 황후가 된 시절의 젊디 젊은 모습 그대로, 자신을 지키려다 먼저 간 무명 앞에 선채로 꼿꼿하고 가련하게 죽는다.
물론, 이런 단점 역시, 영화의 설정이 그러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면 대수가 아닌 게 된다. 이건 영화이고, 팩션이라고, 그러니 약간의 윤색 정도는 흔쾌히 눈감아줄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한다면, 뭐 맞다. 나도 용인하는 게 속 편하다.
그러나 문제가 그 뿐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중경으로 휘리릭 뚝딱 묘사하다보니, 황후와 무명의 로맨스조차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영화적 허점이다. 솔직히 나는 이들이 그토록 서로에게 절절한 이유를 모르겠다. 사랑하는 무명이 문앞에 있는 걸 뻔히 알고도 황후는 어찌 고종과 그토록 달뜬 섹스를 한단 말인가. 이 장면에선 무명과 파릇한 키스를 나누던 플래시백이 오히려 뜬금없어 보일 정도였다.
혹시 이것은 수애의 최초 베드신이라는 영화 외적인 흥행 요소와 영화 내적인 서사 알리바이를 무리하게 화해시키려다 생긴 충돌이 아니었을까? 차라리 무명의 사랑은 진심이었다 쳐도, 황후는 그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 것일 뿐이라고 설정했다면, 명성황후의 낭만적 이미지에 흠집이 가는 것일까? 강박인지 무능력인지 몰라도 프로듀서와 감독의 어정쩡한 입장이 영화를 어정쩡하게 만들고 말았다.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재연하기 위해서였겠지만, CG에 기댄 초현실적인 액션 장면 역시 영화의 드라마적 흐름과 자주 엇나가며 어색함만을 드러낼 뿐이다. 삐걱대는 서사 속에서 인물들은 마치 임무를 수행하듯, 자신에게 맡겨진 감정을 수행하듯 발악하다 끝난다. 그러니 공명이 생길 리 없다.
결정적으로, 왜 최근의 팩션 영화들은 역사를 이렇게 유치한 방식으로밖에 소비할 수 없는 건지 답답증이 몰려온다. 팩션은 상상력의 빈곤을 가리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 터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