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내 사랑 내 곁에' 맞춤형 슬픔
cinemAgora
2009. 9. 25. 11:20
<내 사랑 내 곁에>를 시사에서 본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관련 글을 쓰지 못했다. 이 영화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주변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묻는다. "<내 사랑 내 곁에> 슬퍼요?" 그리곤 대부분 보고 싶다고 하는 걸 보니 흥행은 어지간히 되겠다 싶어진다.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많은 분들이 특히 주연배우 김명민의 살신성인적 감량 투혼을 앞다퉈 칭찬했다. 그리고 그 투혼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말들을 잊지 않았다.
요컨대, <내 사랑 내 곁에>를 둘러싼 호기심의 기저에는 '슬픔에 대한 기대감(말이 이상하지만 사실이다)'과 건강을 상하면서까지 체중을 뺀 김명민이라는 배우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게 작용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건 앞뒤가 살짝 뒤바뀐 느낌이 든다. 나는 <내 사랑 내 곁에>와 관련해 "영화가 좋냐?"고 묻는 질문을 단 한번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좋냐 나쁘냐가 아니라 슬프냐 안슬프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김명민의 피골이 상접한 나신이 그 슬픔을 강화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냐 말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 그것이 장르로서의 멜로 영화의 숙명이다. 슬픔을 제조 판매하는 것 말이다. 박진표 감독은, 멜로의 숙명까지 껴안는다. 그는 관객들을 위해 '맞춤형 슬픔'을 제조해 놓고, '자, 이제 실컷 우시오' 하는 듯한 영화를 내놓았다.
사람이 죽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이들이 사별하는 이야기다. 그게 슬프지 않으면 이상한 노릇 아니겠는가. 게다가 남자는 점점 불쌍해지고, 여자는 점점 지고지순해 지니, 안울고 버틸 재간이 없는 영화인 것이다. 남녀 주인공의 사별이 아무리 무한반복되는 소재일지라도, 설정과 등장 인물만 살짝 바꾸면 이게 또 먹힌다. 흔하지만 우리가 언젠가 겪을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소재는 그래서 진부하지만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이제, 앞서 내가 영화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고 한 이유를 말할 차례다. <내 사랑 내 곁에>는 멜로로서의 임무, 즉 관객들을 울리기 위한 설정과 장치에 충직한 영화다. 박진표 감독은 굳히 샛길로 흐르거나 쓸데 없이 작가적 서명을 올려 놓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건 그냥 말 그대로, 슬픈 멜로다. 하지만 굳이 그가 안만들었도 슬플 영화다. 한없이 불쌍한 사람들을 실컷 동정한 대가로 얻은 슬픔의 언저리에는 저릿한 공명이 남지 않는다. 그저 내가 여전히 감정이 있는 인간임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데뷔작 <죽어도 좋아>를 비롯해 <너는 내 운명>과 <그놈 목소리>까지 지금까지 실화의 영화적 재연에 능했던, 한편으로 그 센세이셔널리즘의 힘을 활용하는 데 익숙했던 박진표는, 순전한 허구의 세계로 들어서자마자 장르의 관성에 상상력을 내맡기는 무기력을 드러낸다. 어쩌면 이것은 처음부터 그가 가졌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내가 기대하는 '좋은' 영화의 반열에 올려 놓을 수는 없다. 슬펐지만, 극장문을 나서는 순간, 그 슬픔은 증발되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남는 건 있다. 김명민의 비쩍 마른 나신과 하지원의 세미 누드와 둘의 병상 베드신, 그리고 노래 '다시 태어나도'는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