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이태원 살인사건' 진실 앞의 무기력

cinemAgora 2009. 9. 10. 13:14

피해자가 있다. 그리고 가해자도 있다. 명백한 살인 사건. 그러나 용의자가 둘인 게 화근이다. 서로 자신이 아닌 상대방이 찔렀다고 주장한다. 분명 둘 중의 한 명이다. 그런데 이들 중 누가 찔렀는지 명확하지 않다. 진실은 둘만이 알고 있다. 그렇다면 법은 과연 누구를 처벌할 수 있을까.

이 기막힌 이야기는, 지난 1997년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이다. 이태원 햄버거 집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한 대학생이 무참히 칼에 찔려 죽었다. 목과 가슴 등을 아홉 차례나 난자 당했다. 용의자는 한국계 미국인 소년 두 명. 이들 가운데 한 명이 재미 삼아 무고한 사람을 찔렀다.

12년만에 이 사건을 재구성한 <이태원 살인사건>은 수사를 맡은 검사의 입장에서 당시의 정황을 풀어 헤친다. 실제 사건이므로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정황은 누구나 알 터이니, 영화는 이들 중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진범인지를 한꺼풀씩 벗겨가는, 스릴러적 퍼즐 게임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그보다, 영화는 분명히 실재하는 진실 앞에서 그것을 규명할 수 없는 법체계의 무기력에 천착한다. 진실을 밝혀내 보겠다고 동분서주하지만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검사의 망연자실한 표정 속에 무력한 절망과 분노가 엇갈린다.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의 삶을 다룬 <선택> 등 주로 한국현대사의 모순과 부조리에 관심을 쏟아온 홍기선 감독의 작품. 장르적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는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미결로 남은 실제 사건을 통해 껍데기 정의만 남은 우리 사회의 일면을 응시하고 있는 감독의 안타까운 시선 때문이다. 9월 9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