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전지현의 실패, 매니지먼트의 실패

cinemAgora 2009. 6. 15. 12:07

전지현이 출연한 <블러드>가 국내 개봉에서 처절하게 깨졌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을 보니 전국 3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해 놓고도 불러 모은 관객수가 고작 7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당초 글로벌 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지겠다는 야심이 무색할 정도다.

<블러드>의 개봉 스코어는 전지현이라는 아이콘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우선, 영화의 품질을 떠나 전지현이 배우로서 사실상 완전히 티켓 파워를 상실했다는 반증이다. 지난해초 개봉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 이어 그녀의 출연작이 잇따라 흥행 참패한 것은, 전지현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 수준이 상당히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지현은 어느 인터뷰에 나와 배우가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가 없다고 말했지만, 당연하게도 관객들은 연기 잘하는 배우에게서 쾌감을 느낀다. 그녀의 멋진 자태는 이미 TV CF에서 신물나게 봤기 때문에 영화에서만큼은 플러스 알파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전지현은 <엽기적인 그녀> 이후의 작품에서 그 플러스 알파를 입증하는 데 실패해 왔다.

사실, 이것을 전지현 개인의 문제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그녀가 2000년대 이후 가장 각광 받는 20대 스타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전지현은 그 자체로 대중문화 아이콘이고 고가의 매니지먼트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전지현의 실패는 전지현에 대한 매니지먼트 전략의 실패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비단 전지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 연예 매니지먼트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실패를 의미한다.

한국의 매니지먼트는 소속 배우를 육성하기보다 소모시키는 쪽에 집중해 왔다. 전지현의 소속사 역시 <엽기적인 그녀>를 통해 얻은 엄청난 호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골몰한 나머지, 그녀가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다져가는 일에는 투자를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아냐고? 전지현의 맥 빠지는 연기를 보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그를 진정 아끼는 매니저라면, 드라마는 물론 연극 무대에도 세워볼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년에 적어도 세 편 이상의 작품에 출연시키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연습을 시켰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지현은 CF의 30초짜리 연기에만 통달해 있다. 그 정도 연기는 피겨 요정 김연아가 더 잘한다는 게 요즘 입증되고 있다.

당사자들은 한국 대중 문화의 척박함을 배경적 원인으로 돌릴 것이다. 여배우의 젊음을 소비하려는 문화에서 운신의 폭이 크지 않은 게 당연한 게 아니겠냐고 말이다. 일견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전지현은 그 문화를 바꿀 수 있을만큼의 위력을 지닌 아이콘이었다. 모험과 도전에 나섰다는 이유로 얻게 될 어느 정도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그 척박한 문화에 적당히 편승해 돈이라도 왕창 벌겠다는 의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매니지먼트 업계는 "떳을 때 벌고 보자"는 근시안에서 벗어나 스스로 '컨텐츠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길러야 한다. 스타도 그 자체로 컨텐츠다. 컨텐츠의 질적 수행력을 높이는 건 당연히 그들의 몫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은 미디어의 띄워주기에 잠시 화답할지언정 순식간에 등을 돌릴 것이다. 전지현은 이제 그 타산지석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