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더 레슬러'를 보며 미키 루크를 추억함

cinemAgora 2009. 3. 8. 12:50

<더 레슬러>를 상영하던 토요일 저녁의 극장은 썰렁했다. WBC 한일전의 여파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객석의 10%도 채 안찬 듯 보이는 상영관은 <더 레슬러>와 그 주인공 미키 루크의 현재를 닮은 것 같아 왠지 쓸쓸하게 다가왔다.

나잇살이 덕지 덕지 붙은 걸 떠나 고단했던 삶의 흔적이 역력한 미키 루크의 얼굴을 보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다. 역설적으로, 그의 망가져 버린 얼굴은, 나처럼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관객들로선 영화 <더 레슬러>에서 얻을 수 있는 페이소스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만큼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느낌은 강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키 루크를 처음 만난 건, 1986년이었다. 당시 그 유명했던 <나인 하프 위크>(1986)가 동네 극장에 왔고, 나는 학교 써클의 공금을 과감히 유용해 영화를 보러 갔다.

10대 후반 시절에 목격한 이 영화의 탐미적 성애 장면은 충격이었다. 특히 남녀 주인공이 비가 철철 내리는 거리의 골목길에서 폭포수 같은 낙숫물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서로를 탐닉하는 장면에선 거의 숨이 멎을 뻔 했다.

당시의 미키 루크는 왠만한 수컷은 그냥 집어 삼킬 것 같은 킴 베이싱어의 고혹적인 자태를 충분히 감당하고 있었다. 사실 그냥 감당하는 걸 넘어서 있었다.

그윽한 눈빛과 섬세한 손길로 터질듯한 관음증적 욕망을 때론 수줍게, 때론 과감하게 내뿜고 있는 이 꽃미남은, 매력과 위험을 동시에 내포한 여자를 유유히 '통제'하고 있었으니,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봐도, 한마디로 '뻑가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깔끔하게 빗어 올린 짦은 머리칼. 연약한 듯 강인한 턱선. 내면의 욕망을 젠틀함으로 감추고 있는 듯한 옷차림과 태도. 이런 그에게 한편으로는 '지골로적' 면모가 느껴져 한창 남성성을 체득하던 나이의 내겐 약간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훌륭하지만 왠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하자면 이 영화로 각인된 미키 루크는, 여성이 상대항으로 존재한다는 걸 전제함으로써 존재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를 다시 보게 된 계기는 뒤늦게 국내 개봉한 <죽는 자를 위한 기도>(1987) 를 비디오로 감상한 뒤였다. 이 작품 속에서 미키 루크는 아일랜드 해방군(IRA)의 테러리스트로 등장하는데, 폭력의 굴레에 갇혀 버린 한 처연한 남자의 상황을 기가 막히게 연기했었다.

폭압적 역사에 인간성을 저당 잡히는 풍경은 언제나 슬프다. 정의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지만, 명분 없는 살육을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된, 그러니까 선을 위한 길에서 악을 범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 인간의 고통이, 그의 표정 위에는 있었다.

이 작품으로 미키 루크는 또 한번 내게 각인됐고, 앞으로 그를 많은 영화에서 보게 되리라 기대하게 됐다. 그러나 이후 그의 행보는 그런 나의 기대를 배신했다.

간헐적으로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그리 대중적이거나 주목할만한 작품들은 아니었고, 그의 이름은 내 기억 속에서 시나브로 잊혀졌다.

알려져 있다시피 원래 복서 출신인 그는 1991년 프로복서로 전향했고, 문란한 생활에 음주벽 등으로 가끔 타블로이드 가십에 오르는 인물로 전락했다. 게다가 경기 도중 입은 상처 때문에 얼굴 성형을 한 뒤 예전의 면모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할리우드 가십 언론은 빼먹지 않고 전했다.



프랭크 밀러의 도움에 힘입어 <씬 씨티>에서 '마브'역을 맡으며 영화 배우로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그에게 제대로 멍석을 깔아준 이는 <레퀴엠>으로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한 대런 아르노프스키였다. 그에게 각종 영화상의 남우주연상을 싹쓸이하게 만든 <더 레슬러>가 없었다면, 미키 루크는 여전히 이곳저곳 단역을 기웃대는, 한물간 퇴물 스타로 배우 인생을 마감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더 레슬러>는 완전히 지쳐 버린, 한 쇠락한 레슬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사실상 미키 루크의 자기고백적 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 속 랜디는 정확히 57세의 미키 루크 그 자신처럼 보이기 때문이여, 실제로도 자신의 삶을 투영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내뿜는 만만치 않은 에너지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왕년의 레슬링 스타 랜디는 추억을 구매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동네 시합으로 근근히 먹고 살고 있는 신세다. 게다가 과도한 약물 복용으로 심장 마비를 일으켜 링을 떠나야 할 처지다.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인 딸은 오래전 자신을 떠난 아버지를 냉대하는 가운데 퇴물 스트리퍼 캐시디만이 그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상대다.

손님을 밖에서 만나면 안된다는 금기를 깨고 캐시디는 아주 잠깐 랜디와 바에서 데이트를 즐기는데, 흘러나오는 음악에 심취해 있던 둘은, 건즈앤로지즈와 머틀리 크루, 데프 레퍼드 등을 들먹이며 좋았던 시절로서의 80년대를 회고한다. 80년대에 역시 <나인 하프 위크>의 호시절이 있었던 미키 루크의 눈빛은 이 대목에서 그야말로 '반짝'거린다. 하지만 그 시절의 잔영을 그의 변해 버린 얼굴에서는 쉽게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 그래서 추억으로만 곱씹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처연함을 안겨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랜디는 덧없이 사라져 버린 청춘을 안타까워 하는 고통만큼이나 지금의 고독과 회한을 견디기 힘들다. 살아옴이 그에게 남긴 자국, 더 아슬아슬하고도 더 가학적인 쇼를 원하는 대중의 기호에 흔쾌히 부응했던 삶이 남긴 상처가 버겁다. 그래서 링으로 상징되는 저쪽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쪽 세상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세월은 흐르고, 시선은 자꾸 과거로 향하지만 정답이 없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남는 것은 비좁은 삶의 틈에서 삐져 나온 몇 안되는 선택의 순간들 뿐이다. 랜디는 그 순간의 선택에 남은 인생을 건다. 그것은 랜디의 삶이자, 미키 루크의 삶이며, 언젠가 사라짐을 준비해야 할 우리의 삶이 직면해야 할 딜레마이기에 꽤 진하고도 오랜 공명을 남긴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레슬러>에서의 랜디는, 어떤 기시감처럼 <나인 하프 위크>와 <죽는 자를 위한 기도>에서 이미 본 듯한 미키 루크의 모습을 소환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망가진 게 아니라, 망가짐으로써 그의 원형을 부활시킨 셈이 아닐까.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