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군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는 유명한 속담이다. 영화 <대립군>을 보며 든 생각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은 훌륭하다. 나라가 나라일 수 있는 것은, 이름 없이 희생을 자처한 무수히 많은 ‘익명’의 백성이 존재했기 때문임을 웅변한다. 누군가의 군역을 대신해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 영화 속 조선의 백성들이, 임진왜란의 난리통에서도 싸움터를 버리지 못했던 그들이 영화를 통해 소환된다. 하여, 영화는 그들, 또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인다. “국가는 국민입니다“라는 영화 <변호인>의 외침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캐스팅도 괜찮다. 이정재와 여진구는 각자에게 주어진 캐릭터를 비교적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이 영화는 사실상 백성의 익명성을 상징하는 대립군 ‘토우’(그의 이름은 영화 내내 한 번도 불려지지 않는다.)와 의주로 도망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의병을 모으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세자 광해군의 처지를 슬쩍 등치시킨다. 광해 역시 어쩌면 무능한 선조의 대립군이었음은 마찬가지라는 논리는, 비록 토우가 국가로부터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는 봉건 사회의 ‘핍박받는 개인’ 그 자체일지라도, 비록 세자가 봉건적 신분질서의 꼭대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두 인물을 점차 같은 입장에 서게 만드는 이야기는 영화의 극적 구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여지가 충분하다.
■스포일러 주의
그러나 문제는 디테일이다. 그저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립질’에 나선 이정재는, 왜 세자의 입장에 그렇게 쉽게 동화되는가. 여기에 의문 부호가 생긴다. 왜냐하면 대립군에게 국가란 자신의 처지와 전혀 무관한 것이며, 영화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그들이 설령 나중에 청나라가 될 오랑캐의 편에 선들, 시대의 맥락 안에서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건적 신분 질서에 종속되기로 마음 먹은 이정재의 선택은, 그의 처지와 정면으로 대립(對立)한다. 때문에 이 심적 변화에는 주인공을 불가피하게 압박하는 거대한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쉽게도, 감독 정윤철은 그걸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극적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은 여진구가 연기한 광해인데, 어쩔 수 없이 분조를 떠맡은 유약하기만 한 인물에서 쳐들어오는 왜군들을 향해 스스로 활 시위를 당기는 과정의 변화는 설득력이 있다.
여전히 거슬리는 디테일들. 이솜이 연기한 나인은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광해의 곁을 꿋꿋이 지키는 걸까. 그 부자연스러운 커플링은, 결국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슬로 모션으로 처리된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위한 작위임을 눈치 챌 수밖에 없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게 아니라 결과를 위해 원인을 소비적으로 배치하는 시나리오는 그리 훌륭하다고 평할 수 없다. 내관은 왜 광해를 배신한 것일까. 그리고 왜 그는 죽는 순간에 광해의 정치적 비하인드 스토리를 주절주절 읊는 것일까. 어이 없게도, 우리는 피를 토하는 내관의 입을 통해 조선 왕조사 수업을 듣는다. 중간 중간 광해 일행을 공격하는 마스크 쓴 인간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실타래가 미처 풀리지 않은 채 <대립군>은 (힘들여 찍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다소 엉성한) 공성전 한 번 배치하고 익숙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어떤 시대극이든, 역사적 사건과 인물은 현재의 열망 또는 결핍에 의해 불려 나온다. <대립군>의 시사점은, 지금 이 시대의 무엇과 조우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정치적으로만 올바르되 지루한 이 영화는, 딱히 지금의 정치 사회적 국면을 살아가는 대중의 무의식과 광범위한 접점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