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빈의 감성홀] 슈렉 포에버

수빈's 감성홀 2010. 8. 23. 09:5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가끔 제가 ‘피오나 공주’라는 상상을 합니다.출근하면 마법사 언니들이 저를 기다리죠. 먼저 바탕부터 ‘깝니다.’ 립스틱을 바르고, 화장의 핵심! 눈에 음영을 준 다음...얇은 속눈썹까지 살짝 얹으면(?) 얼굴은 완성! 거울을 들어 살펴보면...음...솔직히 제가 봐도 좀 예쁩니다(ㅜㅜ).

 머리는 풀 때도 있지만, 보통은 이마를 확 드러내어 올립니다. 처음 앵커를 시작했을 땐 짧은 단발이었는데, 어느새 어깨를 넘는 길이가 되었군요.가끔 너무 세게 묶으면 퇴근할 때쯤 머리가 지끈지끈할 때도 있습니다.뉴스 회의를 하고 스마트폰을 이용해 뉴스를 검색하기도 합니다.5시,6시,7시...시간은 뒤로 갈수록 점점 빠르게 흐릅니다. 어떤 땐 밥도 미처 못 먹고 마지막으로 의상점검까지 마치면 헉 스튜디오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바바바바바밤~9시 뉴스 로고가 울릴 때면 완벽한 변신!이제 아나운서로서의 프로페셔널까지 덧입히면...집에서 도수 높은 안경 쓰고 뒹굴거릴 때완 영 딴판이 됩니다.

 절세의 미녀 피오나 공주. 하지만 그녀도 해가 지고나면 흉측한 ‘괴물’로 변신하죠? 옛날 옛적 신데렐라도 12시 땡!치면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처럼.

 저 역시 10시가 지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마찬가집니다.시청자들이 보는 제 모습은 없습니다.철저한 자연인, 남들과 똑같이 편안한 복장에 편안한(어떤 분은 불편할 수도 있겠군요) 얼굴이 됩니다. 멋진 뉴스앵커(?)에서 서른살 미혼여성(?)의 모습이 되는 거지요.아, 그렇다고 ‘괴물’수준은 아니니까, 너무 ‘화장발’로 몰진 마세요. 화장 안 한 얼굴이 더 어려보인다 굳게 믿으며...거리를 활보하는 걸요? 하하...

 매일 매일 얼굴에 화장을 덧입혔다 지우는 것처럼,마음에도 화장을 했다 지우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그렇다고 ‘가식’이라 할 순 없어요. ‘겁나먼 왕국’의 ‘공주’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있듯이 아나운서에게는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합니다. 적어도 카메라 앞에서만큼은 그렇습니다. 붉으락 푸르락 화가 나서 뚜껑이 열릴 것 같아도,소중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던 날도, 금방이라도 몸져 누을 것 같아도 티를 낼 순 없습니다.누군가 맘대로 갈겨 쓴 ‘소설’ 때문에 오해받고 펑펑 울다가도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카메라를 마주했죠. 울적한 일이 있던 날도 화면이 넘어갈 때마다 눈이 아닌 가슴으로 울었습니다.화장이 번질까봐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몇 번이나 식히면서요.아마 저 뿐일까요. 모든 선배 동료들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피오나 공주는 저주가 풀리면 ‘미녀’가 될 줄 알았지만, 이게 웬걸 본모습은 못생긴 ‘괴물’이었습니다. 운명의 짝도, 늘 상상하던 ‘멋진 왕자님’이 아니라 못생긴 ‘슈렉’이고요.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요! 하지만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또 그 모습을 사랑해줄 사람이 서로임을 알기 때문이죠.

 저도 화면에 나오는 뉴스앵커의 모습이 아니라-조금은 실망스러울 지도 모르는-‘자연인 조수빈’을 사랑해줄 솔메이트를 찾아 ‘겁나 먼’길을 가는 중일지도 몰라요.민낯을 예뻐해 주고,‘왜 뉴스할 때처럼 멋지고 똑똑하지 않느냐?’는 바보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 남자요.일상으로 돌아온 여성으로서의 제 모습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늘 이상형으로 ‘눈이 크고 부리부리한’ 남자를 꼽곤 했는데,어쩌면 저의 왕자님은 못생기고 뚱뚱한 ‘슈렉’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마음만큼은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프린스 차밍’처럼 잘 생겨도 마마보이는 정말...‘우웩!’이에요.

 두 사람이 꾸려나가는 가정도 어찌 장밋빛이기만 할까요? ‘슈렉’ 시리즈의 대단원, ‘슈렉 포에버’를 보셨는지요.개인 생활을 갖고 싶은데 애들은 빽빽 울고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빠듯하게 일상은 돌아갑니다. 

 뚜렷했던 이상형, 결혼에 대한 장밋빛 환상은 다행히 조금씩 사그러 들고 있습니다. 빡빡한 일상 속에 치여 달콤한 말은 해줄 수 없을지라도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 슈렉같은 사람. 묵묵해도 진득한 짝이 있을 거라고,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집니다.아! 물론 마법사의 꼬임에 속아 ‘계약서’에 사인하는 슈렉을 보니 신랑감이 착하면서도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는 똑똑함은 좀 갖췄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 하나 정도는 생기네요.

 모험길에서 당나귀 동키와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친구를 만났듯, 저도 길지 않은 인생길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여럿 만나고 있습니다. 당차고 적극적이던 피오나 공주처럼, 세상사에 부딪혀 왔지만, 스튜디오를 나와 일상으로 돌아가면 긴장감과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보통 사람이기도 합니다.워낙 ‘겁나 먼’게 인생길이라 아직 가슴 따뜻한 왕자님까진 못 만났어요. 하지만 꾸역꾸역 지면을 통해 글을 쓰는 건, 카메라 앞에서 ‘쓸 수 밖에 없는’ 가면을 벗고, 참모습, 속마음을 보여주고 싶어섭니다. 

 혹시 저의 민낯에 실망하시는 건 아니겠죠? 마법이 풀린 피오나처럼,조금 추할 지 몰라도 자연스런 모습, 보여드리고 있겠습니다.

 

+이 글은 과거 ‘스포츠 동아’에 짧은 분량으로 썼던 글을 재구성한 겁니다. 못다한 말을 담아서요..^^

                                                                       posted by 조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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