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이동인가 복제된 건가?

늙은소's 다락방 2010. 5. 7. 09:19 Posted by 늙은소


[스타트렉] 하면 절대 빠질 수 없는 두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워프로 이동하는 순간의 우주선이며, 다른 하나는 순간이동을 기다리며 선 승무원의 이미지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승무원들은 순간 이동 기술을 통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한다. 그들은 이것을 '전송'이라 부른다. 이곳에 있던 내가 저곳으로 이동했음을 강조하기에 '전송'은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사실 기계가 전송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재조립을 위한 데이터 뿐이다. 그들은 어느 곳으로도 이동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기계는 신체 구성 물질을 스캔한 뒤 이를 데이터로 전환해 도착지점으로 전송한다. 이때 전송기 위에 올라선 신체는 원자단위로 분해되며 비물질화가 진행된다. - 그들은 그렇게 소멸한다 - 그와 거의 동시에 도착지점에서는 전송된 데이터에 따라 새로운 신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무엇으로 신체를 만들어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분해된 원자단위의 비물질을 애써 전송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곳의 나는 사라지고, 저곳에서 다른 '나'가 태어난다.

이런 생각을 하며 [스타트렉]을 보면 순간이동이 참 잔혹한 행위가 아닌가 싶다. 전송대가 사실은 사형대일 수도 있는 일이니.

어떤 관점으로 본다면 [스타트렉]의 순간이동 기술은 인간복제로 정의될 수 있다. 체세포를 수정란으로 만들어 인간을 복제하는 방식은 긴 시간을 요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가 지금의 내가 되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나의 세포로부터 발생한 복제인간이 지금 내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니.. 그러나 [스타트랙]의 세계에서는 분해되기 직전의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복제인간이 창조된다. 신체의 구성물질을 완벽하게 분석해 이를 그대로 재조합하면, 그 순간의 기억과 감정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게 이 세계의 순간이동 기술의 핵심이다.

그러니 '순간'이나 '이동', '전송'은 핵심 단어가 아니며, 진실을 가리기 위한 위장에 가깝다. [당신은 지금 이곳에서 제거될 예정입니다. 우리는 즉시 당신의 복제인간을 만들 생각입니다. 그 복제인간은 자신이 '이동'했다고 믿습니다]라는 말을 감추기 위해 선택된 단어가 '이동'이다. 가여워라. 엔터프라이즈 호 승무원들이여.
 

[스타트렉] : 이들은 이동한 것인가, 복제된 것인가.

상상해보자. 인간복제 기술이 완성 단계에 이른 미래의 어느 날. 순간이동 기술이 '인간복제' 산업을 위기에 몰아넣는 풍경을. 이건 마치 부르면 달려오는 공중전화를 개발하려는 찰나 '휴대폰'이 등장한 꼴이다. 머리카락 하나로 복제인간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복제인간을 고속성장시키는 기술까지 갖춰놨더니, 난데 없이 인간을 원자 단위로 분해해 데이터화한 다음 다시 재조합하는 기술이 등장하는 거다. 게다가 분해 시점의 감정과 기억까지 그대로 간직하다니. 평생을 인간복제에 힘써온 인력과 산업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 아닌가. 이런 상황이면 인간복제 기업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로비스트를 고용해 이 기술을 '순간이동'에만 사용하도록 정부를 압력할 만도. 데이터가 해킹을 당할 수 있다느니, 기억과 감정을 간직한 복제인간의 비윤리성도 경고하겠거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용이 비싸고 제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인간 복제보다, 싸고 빠르게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동기술에 사람들은 몰려들 게 자명하다. 그 때가 되면 싸게 만든 복제 인간의 '기억을 지워주는 암시장'같은게 형성되려나?

반대로 순간이동기술을 개발한 회사 입장은 어떨까? 이들은 중요한 갈림길에 직면한다. 이 기술을 '복제'로 정의할 것인가, '이동'으로 정의할 것인가. 회사 내부에서는 이 기술을 생명복제나 제품의 대량생산으로 발전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수익을 추구하는 주주와 이사진들은 저가의 인간복제와, 제품의 대량복제로 단기간 막대한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기술개발부서는 기술적 진보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순간이동쪽으로 사업을 발전시키자 주장한다. 전자의 경우는 신기술이 기존에 존재하는 바이오공학의 일종인 양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또한 이후 '순간이동'으로 사업을 전환하는데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복제'를 위해 사용하던 기술이 '이동'에 사용된다고 소비자를 설득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처음부터 '이동수단'으로 알고 사용하는 것과, 사형대로 알던 것을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게끔 인식을 전환시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더 문]


'순간이동' 기술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전송기 위에 올라 선 제임스 커크를 데이터화한 다음 비물질화를 진행해 사라지게 만든 후, 한 30년 쯤 뒤에 조합시킨다면. 조합된 커크는 자신이 순간이동과 동시에 30년 뒤의 미래로 시간이동까지 하였다 생각할 게 분명하다. 또 다른 방법. 커크를 제대로 전송해놓은 다음, 전송시 사용한 데이터를 지우지 않고 보관해놓았다가 10년 뒤에 커크 선장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리되면 현재의 커크는 10년 전의 자신이 시간이동하여 지금의 나를 찾아온 것으로 여기겠지.

혹은 이럼 어떨까. 실력이 출중한 제임스 커크를 순간이동하라며 전송대 위에 세운 다음 데이터를 추출해서 대량 복제하는거다. 그런 다음 엔터프라이즈호를 여러 대 생산해 각각의 우주선에 제임스 커크를 태운 후 우주 각지로 보내 임무를 수행하게 한다면? [더 문]이 그런 영화다. 과거 어느 한 시점의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스캔 데이터를 대량 복제해놓고, '3년 근무 기한을 채우라'며 달 기지에 보낸 다음 20년간 노동력을 착취하는 이야기.

[프레스티지]


[프레스티지]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순간이동'으로 위장했으나 사실은 '복제'를 이야기하는 영화. 더불어 '내가 나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영화.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순간이동과 복제'의 문제로 놓고 보면 이 세 영화는 같은 맥락으로 묶인다. 신기하지 않은가 [프레스티지]와 [더 문]을 본 다음 [스타트렉]을 보면, 엔터프라이즈 호 승무원들의 순간이동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니.

한 편의 영화를 전혀 다른 맛으로 식사하는 방법.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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