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과잉

별별 이야기 2010. 3. 28. 09:20 Posted by cinemAgora

뉴스 서핑을 하다가 "김연아 은퇴해라"는 칼럼이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 놓음"이라는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며, 김연아가 이제는 내려설 때라는 것을 정중하게 시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룰 것을 다 이뤘으니 정상에 있을 때 내려서는 게 좋겠다는 충언(?)이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김연아도 평범한 대학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이제 그녀가 성적에 대한 과도한 중압감에서 벗어나 '다른'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내가 김연아의 은퇴를 권고하는 입장에 동의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연인 김연아가 아니라, '국민적 스포츠 영웅' '피겨 여왕'이라는 수식어로 포장된, 즉 문화적 아이콘이자 이미지로서의 김연아와 관련돼 있다.

김연아의 이미지는 한국의 문화지형에서 피겨 스케팅이라는 종목이 갖는 특수성과 맞물려 있다. 몇년 전만 해도 피겨 스케이팅은 기껏해야 명절 때 공중파 TV의 시간 때우기용 편성으로 간헐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관심 바깥의 종목이었다. 우리에게 피겨는 팔다리 긴 서양 선남선녀들의 전유물처럼만 여겨졌던 것이다.

이 때 김연아가 등장했다. 김연아는 우리도 학처럼 고고한 자태로 세계를 재패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서구인들에 대한 한국인의 신체적 컴플렉스를 일거에 해소시킨 장본인이 됐다. 때마침 '아사다 마오'라는 대항마가 김연아의 활약을 한일간의 자존심 대결로 몰아갈 든든한 서사적 배경으로 작용한 것도 큰 몫을 차지했다. 관심 바깥에 머물렀던 피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약 국민 스포츠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한번도 빙상장에 가보지 못한 이들에게조차 트리플 악셀이니 컴비네이션 점프 따위의 전문 용어를 줄줄 꿰게 만들었다. 

김연아는 또한, 유사 이래 '몸'에 대한 관심이 최대치로 창궐해 있는 분위기 속에서, 몸이 곧 상품이 되는 시장 속에서 '몸의 미학과 경제학'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군더더기 없는 몸매, 역동적 비상과 우아한 손놀림, 섹시한 표정은 그 자체로 이 시대의 이상적 육체의 현신으로 추앙됐다. 그리고 어김 없이 그 이미지는 숱한 광고들을 통해 확대재생산됐다. 이제 김연아가 한국에서 가장 섹시한 '여인'이라는 데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지금, 어딜 가도 김연아를 본다. 거리 광고판에서 인터넷에서 TV에서 하루에 한번쯤 그녀를 보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을 정도다. 도대체 그녀가 몇 개의 광고에 출연하고 있는지 일일이 다 세기도 어려울 정도다. 그녀가 이룬 눈부신 성과를 감안하면 당연지사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우리의 시각 환경은 김연아라는 이미지에 의해 너무 많이 포획돼 있다. 한마디로, 김연아 과잉이다.

과잉이 부르는 부작용은 두 가지다. 광고 전략적 의미에선 피로도 상승, 문화적 의미에선 획일화다. 전자는 광고주들이 걱정할 문제이니 넘어가더라도, 후자, 즉 획일화의 부작용은 꽤 심각하다. 김연아 과잉 현상은, 미의 기준을 '김연아적'인 것으로만 반복 주입함으로써, 안그래도 팽배해있는 이 사회의 육체에 대한 편집증을 강화할 위험이 농후하다.

물론 김연아 성공 신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그것은 뉴스나 칼럼에서 다룰 일이로되 이미지는 아니다. 이미지 과잉은 김연아가 일군 눈부신 퍼포먼스의 '과정'은 증발시키고, 그 최종 현상으로서의, 즉 상품으로서의 몸만 남기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피겨라는 종목과 결합돼 강화됐던 김연아의 이미지는, 이제 피겨라는 근거지에서 분리된다. 침대에서 앙증맞게 뒹굴거나 짝 달라 붙은 가죽 바지를 입은 채 상품 옆에서 사뭇 고혹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연아는, 더이상 피겨 영웅이 아닌 섹시 아이콘이다. 이것은 박지성이나 장미란 같은 다른 스포츠 영웅이 자신의 근거 종목과 연관성을 가지고 광고에서 노출되는 방식과 확연히 다른 것이다.

이렇게 현상이 본질을 압도해 버린 상황에서 김연아가 견인한 피켜 스케이팅에 대한 관심이 과연 김연아가 은퇴하거나 그에 필적하는 선수가 나오지 않았을 때도 건재할 것인가도 미지수다. 물론 이건 자연인 김연아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 문제는 김연아가 아니라, 그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철쭉이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봄들에 철쭉만 피어 있다면 지루한 이치처럼, 너무 흔해 지루해진 이미지 김연아에게도 오색 들꽃에 자리를 내주는 '아름다운 마무리'가 뒤따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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