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 때 '강릉의 이영애'였습니다

수빈's 감성홀 2010. 2. 7. 16:5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저는 한 때 이영애였습니다.

갑자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구요? 정말입니다. 심은하도, 고현정도, 전지현도 아닌 ‘강릉의 이영애’였어요.

KBS는 같은 공중파여도 SBS, MBC와는 달리 입사하고 1,2년 정도는 보통 지역근무를 한답니다. 그래서 뽑히고도 금방 금방 전국 프로그램에서 얼굴 찾아보기가 힘든 거죠. 아마, 처음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땐 ‘뽑혔다!’는 기쁨에 펄쩍 뛰느라 그 사실을 깜빡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1년 쯤이야~했지만 막상 차에 이삿짐을 바리바리 싣고 대관령 고개를 넘을 땐 왈칵 눈물이 나더군요. 참 유난 떠네~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땐 그랬습니다. 특별히 강원도가 싫었던 건 아니에요. 아니, 솔직히 이런 저런 프로그램도 많이 해보고 방송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대도시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래도 그것보단, 철없던 아이 같던 제가 대학졸업하자마자 바로 혼자 사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데서 두려움을 느낀 겁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방송국 기억하시나요? 언덕배기에 자리한 조그마한 건물. 그곳이 제가 처음 근무했던 강릉 KBS였습니다. 아나운서를 꿈꿀 땐 커다란 스튜디오와 화려한 조명을 상상했었죠. 하지만 제가 첫 마이크를 잡았던 곳은 시골학교만큼이나 작을 것 같은, 강원도 방송국이었습니다.

처음 엄마와 방송국 앞에 도착했을 때 왜 그렇게 바람이 강하게 불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가끔 친구들과 관광삼아 왔던 강릉이 그랬듯, 공기만큼은 맑고 산뜻했죠. 그래도 타지에서 온 스물 넷, 신입 아나운서에겐 그 공기마저 낯선 이방인 같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라디오 PD이자 DJ, 은수(이영애)의 자리가 있던 그 햇살 좋은 사무실이 바로 제가 1년 동안 근무했던 사무실입니다. 저는 외로울 것만 같은 강릉에서의 1년을 스스로 ‘강릉의 이영애’라고 농담 삼아 부르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이런 저런 포즈로 선배들과 사진을 찍으며 미니홈피에 ‘이영애’란 제목으로 올렸죠. 이영애씨 팬들한테는 돌맞을 일이지만, 그렇게 저는 서울에 남기고 온 저의 지인들에게 강원도 입성을 알렸습니다.

언젠가부터 사랑에 빠진 사이, 상우(유지태)와 은수가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곳은 사실 2층 라디오 스튜디오 앞입니다. 매일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직접 진행했던 은수처럼, 저도 그 스튜디오 안에서 매일 한 시간씩 오전 열한시면 ‘FM음악여행’이라는 가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지역 방송사엔 라디오 PD가 없거든요? 그래서 저도, 영화속 은수처럼 직접 기계를 만지고 선곡을 하고, 어떤 코너를 짤까...고민도 하고, 가끔은 직접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강원도에서 보냈던 1년...처음 몇 달간은 지독히도 힘들었습니다. 선배들은 참 잘 해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징징대며 보챘던 게 죄송스러울 정도로...하지만 관광지를 놀러 다니는 것도 한 두 번. 혼자 떨어져 산다는 건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 발령 나던 당일까지 어디로 갈지 몰라서 집을 미리 구해 놓지 못했죠. 부랴부랴 도착해 보니 전세로 구할 수 있는 집이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구한 집은 여자 혼자 살기엔 다소 퀭 했습니다. 밤이면 혼자 잠드는 것이 두려워 몇 번이고 자물쇠를 확인했습니다. 혼자 밥을 해 먹어도 입이 하나라 다 먹기도 전에 상해서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난 생활력은 빵점이구나...제 자신에게 많이 실망했던 날들이었습니다.

함께 소리를 찾으며 사랑에 빠졌던 은수와 상우. 하지만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죠? 장거리 연애가 어렵다는 것도 그 때 알았습니다. 남녀에게 싸워도 금방 달래줄 수 없는 거리에 있다는 건, 매일 시험을 치르는 것 같더군요. 한 사람은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조바심내고, 또 한 사람은 지치고 힘든 마음으로 전화기를 붙들다가도 곧 흔들리곤 하는 감정이 반복됐습니다. 몇 년 후에야, 그 때 그가 지독히도 힘들고 아파했다는 사실은 몇 년 후에야 들었습니다. 내뱉은 칼 같은 말들 때문에 마음 아팠을 게 생각나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마음이 많이 미어졌습니다. 미안하고, 미안하고....미안했어요. 진심으로.

라디오 뉴스 하나를 해도 자꾸만 더듬고 실수를 했습니다. 프로그램을 하다가도 사고를 몇 번이나 냈죠. 내가 과연 시험쳐서 아나운서 된 애가 맞나, 믿기지 않았습니다.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마음 앓이만 하고 능력 없는 제 자신이, 갈대처럼 나약하게 이랬다 저랬다 흔들리는 제 자신이 너무나 밉고 싫었던 시간입니다. 글쎄요, 저만 이랬는지, 다른 선후배 동료들도 이랬는지....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부른 소리 였구나 반성하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어쩌면 그 스물 네 살이...제겐 정말 사춘기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시간은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마력이 있는 걸까요? 그땐 힘들고 아프다고만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리 외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보석처럼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길고 처진 눈으로 부드럽게 웃는 유지태씨의 미소처럼....따뜻하고 진실된 사람들을, 강원도에서 만났습니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고, 아는 사람도 할 일도 없다며 짜증내던, 지금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제게, 마음을 터놓았던 한 선배는 말했습니다. “강릉에 있는 1년을 즐겨라. 나중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고. 왜 그땐,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자신했을까요?

시간이 잘 안 간다며, 조급해하던 제 마음은, 아름다운 강원도의 자연이 달래주었습니다. 답답할 때면 안목 앞바다로 달려가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그래도 1년이나 있었던 덕분일까요. 사람들이 북적대는 경포대 앞바다 뿐 아니라, 어딜 가면 조용히 있을 수 있는지. 어느 바다가 어느 산천이 더 예쁜지, 숨은 명소를 지도만 보고도 찍어내는 고수가 됐습니다. 지금은 서울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커피공장, ‘테라로사’ 안목 파도가 내 앞으로 몰아칠 것만 같은 까페 ‘엘빈’. 삼척까지 달려가면 가파른 절벽 위에 있던, 지금은 이름이 가물가물한 맛난 스파게티집...‘양미리’란 생선이 있는 것도 몰랐는데 양미리를 갖고 축제까지 한다는 걸 알게 된 주문진 항구..파란 바다 위에 서 있던 빠알간 등대...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곳들이 마구 마구 머리 속을 지나가네요. 훗. 모두 눈에 선합니다.

강릉에 들어설 때 넘어야 했던 굽이굽이 대관령 고갯길은 어떤가요. 전 서울에서 내려갈 때만해도 운전면허가 없었습니다. 강릉에서 운전면허를 딴 덕분에, 실기 연습을 그 대관령에서 했죠. 내려올 땐 눈물 고개였지만 운전에 그리 소질 없는 제가 면허를 따게 해준, 고마운 실습장이 되었습니다. 평일 오전이면 대관령엔 거의 차 한 대 구경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속도를 무서워하는 저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고 페달을 밟고 핸들을 돌리며 연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은수와 상우는 ‘소리’를 찾아 해매다 서로 친해졌죠. 저도 ‘라디오’를 통해 소중한 추억을 많이도 만들었습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했던 그 때 팬들은 제 목소리를 파일로 만들어 선물해주기도 했습니다. 일부는 지금도 저와 온라인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을 정도로.

그렇게, 좀처럼 가지 않을 것만 같던 1년,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강릉에서의 마지막 날이 불현 듯 찾아왔습니다. 이별이란, 참 순식간이죠? 선배들에게도 좋았던 사람들에게도 뭔가 멋지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는데...마지막 날은 이삿짐을 챙기느라 참 많이도 바빴습니다. 이곳에 내려오던 날이 그랬듯. 다시 이삿짐을 작은 차에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발령날짜에 맞춰 올라오느라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만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언제 1년이 다 되나, 목메며 기다렀던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면 기쁠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 대관령 고개를 넘으면서 다시 한번 왈칵...눈물을 쏟았습니다.

자주 놀러 올게요, 라고 말해놓고 전 그 뒤로 강릉을 찾지 않았습니다. 아니, 딱 한 번 너무 그리워서 평일 오후시간 왕복 여섯 시간을 내달려 딱 한 시간 다녀 온 적이 있긴 하죠. 하지만 그 한 번의 짧은 방문 이후 다시는 강릉을 찾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이...변하니?”라고 물었던 상우의 마음. 그 대사처럼 제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변해 있을 것 같아 두렵습니다. 내가 없는 그 자리에 강릉은 변함없이 있지만, 그 안에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오전 열한시에 강릉에서 89.1을 틀어도 이제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제가 아닐 것입니다.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도...내가 사랑했던 라디오, 내가 사랑했던 강원도의 풍광,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내가 만들었던 추억...이제 그곳에 없습니다.

아마 울면서 메달리던 상우를 모질게 내치던 은수는 몰랐을테지요. 시간이 흐르고나면, 가끔씩 그렇게 성가셨던 상우가 미친 듯이 보고 싶어질 거라는 걸. 마치..제가 그 때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말이죠.

가끔은...‘강릉의 이영애’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posted by 조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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