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밤의 '단비' 를 보며 느낀 씁쓸함

TV 이야기 2009. 12. 29. 11:31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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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일밤'이 모처럼 야심찬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아프리카의 물부족 지역에 우물을 파주는, 이른바 '단비' 프로젝트다. 과연 감동적이다. 이런 소재를 가지고 감동적이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노릇일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보는 내내 삐딱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이른바 생활보호대상 가구였다. 겨울이면 동사무소에서 라면을 준다고 불렀고, 꼬마였던 나는 생계에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라면을 받으러 가곤 했다. 문제는, 그냥 주면 될 걸 꼭 무슨무슨 단체장들이 나와서 사진을 찍는거다. 내가 불쌍하게 생긴 꼬마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그들이 한껏 자애로운 표정으로 건네는 라면을 받으며 사진 촬영에 임해야 하는 모델로 간택되곤 했다. 가뜩이나 주눅든 마음에 자존심까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건 지금까지도 큰 상처로 남아 있다.

어려운 나라에 가서 도와주는 일은 장려해야 마땅한 일이다. 단비 프로젝트도 그런 면에선 칭찬 받을 일이로되, 꼭 이런 방식이어야만, 우리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건가,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 몰려 온다.

지리산고를 나와 서울대에 들어간 켄트를, 다른 나라도 아닌 바로 자신의 출신 국가에 대동하고 나선 것부터 거슬린다. 그를 마치 코리안 드림을 이룬 사람으로 추켜 세우지만, 이제부터 너의 그 후진적인 모국에 우리가 자애를 베풀어줄게, 라는 제스처로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어릴 적 내가 그랬던 것처럼 켄트의 자존감이 혹 상처라도 입지 않을까 걱정된다.

십여년만의 엠씨 등극에 흥분한 김현철은, 현지의 참담한 상황보다 엠씨로서의 역할 수행에 더 몰입해 있는 듯하고, 카메라는 예쁜 울보 한지민의 눈물 가득찬 표정을 포착하는데 게으르지 않음으로써, 시청자들의 동정심을 이끄려 애를 쓴다. 이런 거야 애초부터 연예인을 파견한 버라이어티쇼의 한계이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다른 설정들도 눈에 거슬리는 건 마찬가지다.

특히 그들에게 짜파게티를 끓여 주며 한껏 뿌듯해하거나, 연기자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 보이는 한국 동요 '퐁당퐁당'을 그 지역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장면에선 정말이지 내가 다 민망해졌다. 이건 아니잖아?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궁핍한 삶을 축제의 신명으로 돌파하려는, 그들의 그 역동적인 에너지를 배우고 올 일이다.

이 대목에선 괜스레 1950년대 한국전쟁기에 미군차량을 좇으며 기브 미 초콜릿, 기브 미 검 하며 달겨들던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중첩됐다. 그 때 그 아이들은 미군의 시혜에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를 느꼈을까?

누군가를 진정으로 도우려면 그들 문화에 대한 존중심과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열악하다 할지라도 그들이 삶을 일구는 방식과 현장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단비 프로젝트에는 그 대신, 우리도 이제 이 사람들을 귱휼히 여기고 베풀 수 있는 위치에 놓였다는, 알량한 자부심이 더 크게 엿보인다. 그래서 끝내 이 프로그램의 진정성이 와 닿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건,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쌀집아저씨' 김영희 피디, 혹은 그가 속한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쉬는 동안 아프리카 오지를 돌아다녔다는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깊은 성찰 없이 곧바로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는 장삿거리를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동정심 장사.

그래서 그에게, 우리도 원조를 받았으니 이제 원조하자는 식의 국가주의적 캠페인 말고도, 서구인들이 우리에게 보냈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그대로 내면화해 제 3세계에 반사하는 방식 말고도, 그들의 절절한 고통을 인류애적 차원에서 가장 겸손하게 나눌 수 있는 방식을 더 고민하라는 주문이, 별반 쓸모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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