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의 기원으로 따지자면 SF는 과학기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미래지향적 세계관 설파에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과학은 발전하고 인류는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외치던 이 장르는 '다름'과 '변이'를 말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고 그 결과, 대답 대신 질문을 마련하는 영특함마저 얻게 되었다. 

이 영화들이 제시해온 ‘다름’의 표상은 인종과 계급, 문화의 차이에 비할 수 없는 범 우주적인 '다름'이다. 살기 위해 섭취해야 하는 영양분이 다르고 그 삶을 유지하는 방식이 다르며 번식의 방법 역시 다른 존재들. 언어가 다르고 외형이 다른 것은 다른 축에도 끼지 않을 정도로 외계생명체는 낯설고 이질적이다. 그렇다면 이 장르에서의 '변이'는 어떤가. 블랙커피를 마신다고 백인이 흑인으로 뒤바뀌지 않고, 할례를 받는다고 이슬람교도가 순식간에 유대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현실세계의 변이는 극히 제한적이며, 인내의 긴 시간을 요한다. 그러나 SF 장르는 과학과 상상력의 포장 아래 급격한 변이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존재의 공포를 노출시킨다. 에이리언의 알을 몸속에 이식한 동료를 같은 인간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파리 유전자와 결합한 애인이 죽어가는 것을 방관하는 일이 옳은 것인가? 극단적인 다름의 경계 바깥으로 순식간에 내몰린 타자. SF는 다름과 변이를 질문할 때 가장 자신만만한 태도로 관객을 몰아세운다. 



[디스트릭트 9] 역시 다름과 변이에 관한 영화에 속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름과 변이에 거리를 두지 않고 근접 촬영함으로써 '경멸'에 대한 영화로 탈바꿈한다. 카메라는 바퀴벌레처럼 생긴 외계인의 지저분한 삶과 신체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우리가 그들을 마음 놓고 경멸하게끔 유도한다. 외계인들은 도시 외곽, 쓰레기처리장에서 번식한 벌레들처럼 행동하고, 이들을 새로운 구역으로 이주시킬 책임자로 지정된 비커스는 2류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외계인들이 '외형'으로 인해 경멸의 대상이 된다면, 비커스는 2류 인간인 '내부'로 인해 경멸의 대상이 된다. 2류는 1류가 세련된 방식으로 은폐하고 있는 속물성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자들이다. 1류가 2류를 혐오하고 경멸하는 것은 그가 나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감추고 싶은 진실을 제대로 포장도 하지 않은 채 공개해버리기 때문이다. 2류는 1류가 애써 낭만으로 포장한 바람을 불륜이라는 행태로 들켜버리거나, 1류가 애국자인양 행세한 정치행위가 밥그릇싸움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해낸다.  

카메라의 시선을 의식하며 한껏 들뜬 비커스의 과시욕과 어설픈 이기주의, 모순된 말과 행동들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포착되며 그가 2류 인간임을 반복 증명한다. 그는 1류들이 경멸하는 2류이기에, 자신이 경멸할 제 3의 대상을 요구함으로써 분노를 이동시키는 전형적인 중간계급의 행태를 보여준다. 비커스는 외계인과 용병들, 무기거래상을 경멸함으로써 2류인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려 하며, 1류의 일원이기도 한 자신의 아내에게 애정을 확인하려 애쓴다. 이 쯤 되면 계급의 착취보다는 분노의 전환이 사회계급 유지에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른다. 착취해간 대상을 향해야 마땅할 분노를 전혀 다른 곳에 표출하도록 만드는 구조. [디스트릭트 9]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근현대사를 압축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팔레스타인을 떠올리게 하고, 더불어 모든 도시의 슬럼가와 모든 국가의 빈부격차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 변이를 일으켜 외계인으로 변이하기 시작했음에도 비커스는 공포의 대상으로 위치지어지지 않는다. 미디어는 그의 변이를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공포를 삭제한 후, 외계인과 인간의 중간지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덮어버린다. 내가 비커스일 수 있으며, 비커스가 외계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철저히 은폐되고, 공포를 제거한 경멸은 조소(嘲笑)가 된다. 비커스는 자신을 조소하는 이들을 목격하고서야 그들이 공포의 대상으로조차도 자신을 인정하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한 그의 싸움은 자신을 향한 조소에서 웃음을 제거함으로써 시작된다.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고는 다음 단계를 생각할 수 없는 현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고향으로 떠난 크리스토퍼가 돌아와 지구에 ‘본때’를 보여주기 바라게 된다. 

생명을 향해야 할 마땅한 정서는 본디 지속력이 약해 그 단절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기어이 '본때'를 등장시킨다. 역사는 늘 그 지점에서 멈춰 섰으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렀다. 다름이 증오로 다시 경멸로 이어지고, 이것이 조소나 공포가 될지언정 다름의 인정으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 어쩌면 [디스트릭트 9]은 극단적인 '다름'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주변의 다름은 다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지 않았는가 싶다. 이렇게 극약처방이 필요해서야.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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