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전설이다'

수빈's 감성홀 2009. 9. 28. 01:0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방송이라는 거, 보는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하는 사람은 가끔 허 탈해 질 때가 있습니다. 이제 겨우 5년차인 제가 이런 말 할 짬(?)인지는 모르겠네요. 그러나 선배들도 간간이 그런 말을 하셨더랬죠. 방송은, 사람을 행복하게도 하지만 허무하게도 한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소모하는 모래성 같은 느낌이라고.

라 디오는 허무함이 덜 합니다. 제가 지금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누구나가 챙겨듣기는 조금~힘든 새벽 5시(89.1 Mhs 조수빈의 상쾌한 아침)에 나오지만, 그래도 늘 누군가가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게 힘든 새벽 시간, 문자로, 콩으로, 편지로...사연 꼬박챙겨 올려주시는 분들 있으니까요.

하 지만 TV는 가끔 모래성 쌓는 기분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제 방송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일에 파묻혀 일주일을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누군가가 내 방송을 보고 있다는 것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라디오처럼 사연을 받거나 하진 않기 때문에 그 피드백이 직접적으로 와닿진 않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TV 방송 진행자들은, 때때로 자신을 혹독하게 다뤄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시청자 반응을 즉각 즉각 느끼긴 힘들기 때문에, 혼자서 열심히 모니터 하고 계발하지 않으면 왠지 누군가가 보고 있지 않다는 착각(?)이 들어 풀어지기 십상이죠. 그래서 일부러라도 시청자 게시판을 꼭 챙겨 봅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제 방송 뿐 아니라 MBC SBS...때론 해외 방송까지 쫙 모니터 하는 이유도,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서죠.

그래도 가끔...‘사람’을 보고 방송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보고 방송한다는 느낌이 들 때, 솔직히 있습니다. ‘기계’를 향해 내리 혼자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 말이죠. 가끔은...그래요, 고독하기도 합니다.

‘ 나는 전설이다’에서 주인공 네빌(윌 스미스)이 혼자서 TV 뉴스를 보는 장면에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2012년. 변종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인류는 멸종합니다. 화려했던 뉴욕에도 인간의 흔적은 사라졌죠. 밤이 되면 바이러스에 걸려 좀비처럼 변한 인류들이 미친 듯 돌아다닙니다. 드넓은 뉴욕에 혼자 남은 네빌. 그의 곁에는 셰퍼트 한 마리 뿐입니다.

지 구상에 혼자 남는다면. 얼마나 외롭고 무서울까요? 그래선지 네빌은 끊임없이 말을 합니다. 개에게 말을 걸고, 마네킨에게 말을 걸고, 하루종일 혼자 골프를 쳤다, 물고기에게 밥을 줬다....그러다 밤이 되면 좀비들이 찾지 못하는 집 안에서 두려움에 떨며 잠에 듭니다. 또다시 아침이 되면, 언젠가 인간이 살던 시절, 녹화해 두었던 TV 뉴스- 더 이상은 new하지 않은-를 보죠.

상상해 봤습니다. 만약 내가 하는 방송을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이 지구상에 아무도 볼 사람이 없다면?

아마 뉴스 세트가, 최첨단 카메라가, 눈부신 조명이...거대한 괴물처럼 보일 것 같습니다. 단순히 누군가 보고 있다는 느낌이 ‘와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아무도 없다면...섬뜩할 것만 같습니다.

“내 이름은 로버트 네빌. 뉴욕의 유일한 생존자다.

누군가 이 방송을 듣고 있다면 연락 바란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좀비’가 되지 않은, 나와 같은 ‘인간’이 혹시라도 지구상 어디선가 살아 있을까...네빌은 매일 절박한 심정으로 방송을 송출합니다. 누군가 들을 가능성이 희박한 방송을 매일 한다는 것, 참담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네빌은 한 명이 생존자라도 구출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이 너른 지구에 자기 혼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미칠 것만 같은 느낌에...그토록 끈질기게 녹화한 방송을 보고, 또 방송을 내보낸 것 아닐까요.

아나운서가 되고 이런 질문 참 많이 받았습니다.

“왜 방송을 하느냐?” “방송의 매력은 무엇이냐?”

아 나운서가 고 3때부터 꿈이었으면서. 그 꿈대로 방송국에 들어와 감사하게도 참 많은 기회를 얻었으면서. 참 오랫동안 그 질문에 자신있게 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떨 땐 감사하기보다, 빡빡한 스케쥴에, 혹은 나보다 뛰어난 동료를 보면 느껴지는 자괴감 때문에 내가 왜 방송을 택했을까... TV에 나온 제 모습이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어색해서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나 자신을 소모한다는 느낌, 다른 걸 했다면 돈이라도 많이 벌었을 거야 하는 유치한 생각, 난 재능이 없기 때문에 방송이 잘 안 된다는 속단...그런 것들이 괴롭게 했습니다. 화려한 이미지 때문에 방송을 선택했던 것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 사실 난, 허영심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구상에 홀로 남은 한 남자의 이야기, ‘나는 전설이다.’를 보면서 내가 왜 그리 자책하면서도 방송을 하고 싶은지, 오랫동안 알 수 없었던 답을 찾았습니다.

“바로, 당신이 보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고도 뻔한 답이죠? 하지만 그 답을 진정으로 찾기까지 몇 번쯤은 돌아 온 것 같네요.

그렇다고 ‘사람들이 많이 보는 방송’만이 의미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KBS에는 장애인이나 해외 동포들을 위한 채널도 있습니다. 또 화려하진 않아도 의미 있는 프로그램도 많죠.

아 무리 시청률이 낮아도 이 지구상 어디선가 누구는 저를 보고 있습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휴지처럼 누군가는 제가 하는 방송을 스리슬쩍 한 번 보고 지나가기도 하겠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겐 제 입을 통해 나가는 정보들이 금쪽보다 귀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전 길에서 만나도 알아볼 수 없는 지나쳐 가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저는, 한번쯤이라도 가슴에 남는 이야기를 해 주었던 소중한 인연일 수도 있습니다.

영 화 속에서 아무도 듣지 않을 것만 같던 네빌의 방송. 하지만 그 방송을 듣고 생존자 두 명이 죽을 고생을 하면서 찾아 옵니다. 그들이 네빌을 찾아오던 그 순간, ‘공허한 외침’같았던 네빌의 방송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듣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외침은 생명을 얻습니다.

오 늘도 저는 라디오 부스에 앉고, 뉴스 세트에, 혹은 녹화장에 앉아 여러분을 맞을 준비를 할 것입니다. 어떤 방송은 시청률이 높고 또 어떤 방송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차가운 카메라를 보고 혼자 떠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느슨해 질 수도 있겠죠. 더 심해지면 영화속 ‘좀비’처럼 줄창 읽어 재끼는 생각 없는 앵무새가 될 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말하는 뉴스 내용이 뭔지도 설명할 수 없는 ‘무뇌아’가 되긴 싫은데 말이죠.

그 럴 때마다 ‘나는 전설이다.’에 나오던 네빌을 떠올리려 합니다. 홀로 외치던 그의 방송이, 듣는 사람이 있었기에 더 이상 허무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모래성 같은 소모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 저 카메라 뒤에, 저 마이크 뒤에 단 한 명이라도 나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거라고.

당신이 보고 있어서...당신이 듣고 있어서...‘on air'라는 사인을 기쁘게 받아 들이려고 합니다. 1분짜리 아니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요. 그러니까...오늘도... 봐 주실 거죠? 믿겠습니다!

                                                                          posted by 조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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