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결혼식 -'섹스 앤 더 시티' 극장판

수빈's 감성홀 2009. 7. 12. 02:2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신문에서 대한민국 성인 남녀가 생각하는 ‘결혼의 적령기는 28.6세’라는 조사 결과를 보았습니다. 문득 제 나이를 따져 보았죠. 1981년 3월 생. 기사가 실렸던 날이 2009년 5월 중순이니까, 저는 약 28.3세입니다. ‘적당한 나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3개월이 남았었죠. 아직 약혼자는 없으니, 28.6세에 결혼할 확률은 0%입니다. 뭐, 결혼이라는 거...좋은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좋은 때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라고 위안을 삼아 봅니다.


그래도 솔직히 조금은 불안합니다. 왜냐! 저의 절친한 친구들이 바로 올해!  결혼이라는 스타트를 끊었기 때문이죠. 여자들이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친한 친구가 결혼할 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몇 달 사이 연달아 두 명을 보낸 거죠. 꽃꽂이가 취미인 저는 그녀들에게 부케까지 들려주고, 심지어 사회까지 봐 주었습니다. 겉으론 ‘축하한다’했지만, 섭섭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제 놀 때도, 여행 갈 때도, 밤늦게 고민 상담할 때도 왠지 함께 할 친구들이 줄었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들에겐 신랑이 있으니까요!

유부녀 친구가 신랑 눈치 보느라 제 전화를 안 받을 것 같은 밤이면 케이블 티비에서 무한 방영하는 ‘섹스 앤 더 시티’를 봅니다. 시즌 6까지 보고 보고 또 보고...저야말로 무한시청입니다. 스무살 때부터 애청했지만 나이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뼈를 사무칩니다. 뉴욕의 독신녀 넷. 그네들의 삶은 서울의 한 처자에게도 완전 현실처럼 다가옵니다.

이 언니들은 사십 넘은 나이에도 탱탱한 외모와 빵빵한 커리어, 멋진 패션 감각을 자랑합니다. 골드미스인 4인방은 고민이 있거나 사고가 발생하면 의기투합 똘똘 뭉치죠. 앗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대학 때 저랑 친했던, 학과에서 ‘백치들’이라 불렸던 제 친구들도 시집가기 전엔 이랬습니다. 큭.

하지만 또 동병상련을 느끼는 순간도 있네요. 멋진 그녀들도 사랑이 늘 술술 풀리지만은 않습니다. 캐리는 10년동안이나 빅이란 놈과 만났다 헤어졌다, 동화 속 공주가 되고 싶은 샬롯은 대머리 변호사와 사랑에 빠져 종교까지 바꿔야 합니다. 남자 갈아치우는데 선수인 사만다는 연하 애인과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 유방암 선고를 받습니다. 능력녀 미란다는, 친구 같고 자상하지만 자신보다 조건은 딸리는 스티브를 어째야 하나, 이럴까 저럴까 고민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친구들이 다 짝 찾아 정착할 때까지도 빅과 연애만 하던 캐리가! 마침내 극장판에선 빅과 결혼을 한답니다. 처음엔 그저 빅과 영원한 사랑을 하고 싶은 소박한 마음이었겠죠.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면서 캐리의 꿈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빈티지 드레스를 입겠다던 그녀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명품 드레스에 혹 합니다. 결혼식 장소도 화려해집니다. 유명 패션지 보그엔, ‘인기 칼럼니스트 캐리가 40대에도 결혼한다!’는 인터뷰가 실립니다.

꿈에 부푼 준비하는 캐리를 보면서 제가 봤던 것 중 훌륭한 결혼식은 뭐였나, 꼽아봤습니다. 솔직히 가장 화려했던 결혼식은 모 호텔에서 올린 한 지인의 결혼식이었습니다. 휘황찬란한 드레스에 인테리어에 식사에 축가를 부르는 내로라 하는 가수들까지..몽땅 눈이 다 휘둥그레했죠.


하지만 가장 감동적이었던 결혼식은 따로 있네요. 저와 절친한 라디오 작가, 한 모 양의 결혼식! 식장은 아무래도 호텔보단 소박했고 음향시설이 아주 빵빵하진 않아 결혼행진곡이 살짝 웅웅 울렸습니다. 주례사는 솔직히 재미없었어요. 하지만 그 친구 시아버지가 경건한 식장에 나와 트로트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축가를 근엄함의 대명사, 시아버지가 직접 하시다니! 그것도 트로트를!

그리고 잠시 후 친구 두 명이 나와서 이 커플의 연애담을 꽁뜨처럼 풀어냈습니다. 두 친구는 십년 동안 신랑 신부의 연애사를 지켜봤다고 합니다. 성대모사까지 불사하며 전하는 사랑 이야기! 하객들도 깔깔깔 웃다가 훌쩍훌쩍 눈물을 훔치는...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편지를 읽어주면서 절정에 올랐습니다. 서로 처음 만났을 때 어땠는지, 긴 연애 기간 동안 고비를 어떻게 넘겼는지, 지금 이 순간 서로를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지...신부가 라디오 작가여서 그런가요? 문장 하나 하나가 ‘짠’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날 무렵 두 사람에게 하객들은 진심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제가 많이 보았던 화려한 결혼식에선 온갖 값비싼 치장에 싸여 부부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 결혼식의 주인공은 단연 ‘두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도 아마 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꿈꾸는 결혼식 안에서 영원히 사랑을 맹세하게 될 줄 알았던 캐리. 하지만 결혼 당일 신랑 빅은 도망치고 맙니다. 이혼을 두 번이나 한 빅에게 또 한 번의 결혼은 달콤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던 거죠. 캐리의 꿈은 그 순간 산산 조각나고, 아주 오랫동안 캐리는...그야말로 ‘잠수’를 타 버립니다. 마음 속 깊이 상처를 입은 채로요. 십년 사귄 애인이 결혼식 당일 안 나타날 때 그 마음이 오죽할까요? 윽, 저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집니다.

분노와 증오로 가득했던 마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캐리는 깨닫습니다. 빅이 도망쳤던 이유를. 자신의 결혼을 자랑하는 잡지기사에서 캐리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우리’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걸 발견한 거죠.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함께 해야 하는데, 캐리가 상상하는 결혼 속에 빅은 조연에 불과했습니다. 주연은 자신이었고, 하객수를 정하는 것도 예복을 고르는 것도, 결혼식 장소를 고르는 것도 모두 자기 뜻대로 하려 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두 번이나 이혼을 경험한 빅이 얼마나 불안할지..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도.

캐리가 화려한 결혼식을 탐내기 전에, 제 친구처럼, 소박하지만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식을 그렸다면 어땠을까요? 그래도 빅은 두려움에 도망쳤을까요.

캐리를 비난하고 싶진 않습니다. 캐리의 모습은 적지 않은 여성들의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결혼에 대한 환상이 가득한 미혼 시절, 우리는 참 많은 상상을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생활’이 아닌 결혼‘식’에 대한 상상이죠. 순백의, 비싸면 더 예쁠 거 같은 드레스를 입고 예쁜 꽃으로 가득 장식된 식장에서 주인공은 오직 나! 신부입니다. 그 날 하루, 나를 돋보이려는 여성들이 그리 많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웨딩업체는 그렇게 성업중인 거겠죠?

캐리는 결국 빅과 다시 결합할 수 있을까요. 도망쳤던 신랑 빅은 후회하고 있을까요. 그 결말만큼은 영화 속에서 확인 하셔야겠죠. 만약 결혼에 골인한다면, 뉴욕의 능력 있는 골드미스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일테니 살짝 아쉽긴 합니다. 그렇다고 ‘이 결혼 반댈세!’를 외치기엔 10년간 마음 고생한 캐리가 불쌍합니다. 하하.

언젠간 저도 결혼을 할까요? 영화를 보고 스리슬쩍 그림을 그려 봤습니다. 지금은 너무 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언젠가 결혼을 약속하고 상견례를 하고 어디서 어떻게 결혼할까 저의 그이와 의논을 하겠죠. 유명 스타는 아니지만 직업이 방송인 인만큼 신문에 한 줄 정도 ‘조수빈 아나운서 누구랑 어디서 결혼한댄다.’ 하고 날 지도 모르겠습니다. 늘상 따라 붙는 ‘다른 아나운서들은 어떻게 결혼했나?’ 하는 기사도 날 지도 모르죠.

아직 예비 신랑은 없지만, 혼자 다짐해 봅니다. 어쩌면 결혼하는 과정에서 내가 봐온 다른 사람들의 결혼식보다 돋보이고 싶은 욕심이 생길 지도 모릅니다. 어떤 식으로 사람들에게 보일까 신경 쓰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의 미래의 결혼식이 드레스나 꽃장식, 피로연 메뉴가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 둘’이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다고...사람들이 제 드레스가 얼마짜리인지, 피로연 메뉴가 무엇인지 관심 갖기 보다 조금 부족해도 ‘아, 저 커플 정말 보기 좋구나.’하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화려한 결혼식보다는 소박해도 아름다웠던 제 친구의 결혼식처럼, 부모님과 친구들이 즐겁게 노래하고 하객들이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됐음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미래의 제 신랑과 제가 서로에 대한 믿음을 견고히 하는 그런 자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명품 드레스나, 화려한 식장, 보그 같은 잡지가 행복한 결혼을 만들 순 없다는 것, 즉 돈이나 허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섹스 앤 더 시티’가 제게 준 가르침입니다.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저의 동반자는 이런 제 다짐을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네요. 나를 예쁜 신부로 만들기 보다는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빅처럼 결혼식 당일 도망가는 일은....절대 없으리라 믿.쑵.니.다.

posted by 조수빈 (KBS 9시 뉴스 앵커,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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