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5만원 드릴께요

애경's 3M+1W 2009. 6. 25. 22:0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아부지가 보시고 접어 두신 신문을 집어든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지난 주였죠. 와우! 정말 쇼킹한 1면 편집이었습니다. 잡지와 신문은 다르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종이 인쇄 매체를 만들어왔던 제 눈에 비친 그 신문의 1면은, 그 어떤 의도를 담지 않고서는 도저히 구현해 낼 수 없는 편집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PD 수첩 작가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1면에 <100일 된 정권 생명줄 끊어놓고... 이명박에 대한 적개심 하늘을 찔러...>라는 제목까지 큼직하게 달아 기사를 작성한 걸까요. 더 엽기적인 건 5단 신문 구성 중 1단을 과감히(!!!) 할애해 <검찰이 공개한 이메일 내용>을 적어둔 겁니다. 글씨 크기도 키우고, 컬러 박스까지 만들어, 한 눈에 쏙 들어오는 아주 보기 좋고 명확한 편집 디자인으로 완성하셨더군요. 와우! 대단하쎄요~

그러나 이 의도적인 편집 어쩌란 말입니까. 작가가 보낸 메일의 전체 내용을 다 공개하던가, 머리 자르고 꼬리 자르고 의도에 맞지 않는 대목은 말줄임표로 처리하는 이런 방식. 이걸 보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명박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찔러' 라고 말하는 젊은 여자를 만나면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또한 이걸 누구에게 얘기한 건지, 그런 건 밝히지 않는 거랍니까.

없는 자리에선, 선생 욕이건 보스 욕이건 상사 욕이건 아부지 욕이건 시어머니 욕이건...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후배들이 부하 직원들이 그 외 누군가들이 나에 대해 늘 좋은 얘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걸리지만 말아라'라고 얘기하죠. 나도 누군가의 '뒷말'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 '우상'은 아닙니다. 또 대한민국이 '김일성 욕하면 잡아가'는 그런 나라도 아닙니다(라고 생각해왔는데 급 고개가 갸웃거려 집니다. 혹시 잡아가는 나라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설령 이명박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른다 한들, 그것이 죄는 아닙니다. 지인과 이명박 대통령 욕을 바가지로 쏟아냈다 한들, 그것 역시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공개되면, 이 여자는 죄인이 됩니다.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왜 권력이 한 개인을 이렇게 만들어야 한답니까. 이게 무슨 짓이랍니까 정말. 혹시 '조중동의 권력에 균열을 만들어서...'라는 문장에 대한 응징으로 그리한 것이랍니까?

전 본문을 제대로 읽기도 전에, 이 편집 형태만으로도 갑자기 혈압이 상승됐습니다. 어떤 어르신들은 본문을 제대로 읽기도 전 이 제목과 이 박스 내용만 보고도 '어린 기집애가 대통령을 어떻게 해보려고....' 괘씸해 하시며 혈압이 상승되셨겠지요. 같은 걸 보면서, 전혀 상반된 이유로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우스웠습니다. 평소 '보수 신문' '진보 신문' '좌파' '우파' 뭐 이런 구분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 순간엔 정말 내 가족이 이런 신문을 본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아부지, 웬만하면 신문 좀 바꾸시죠?"

"아니 왜"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웬만하면 바꾸시죠."

아버지가 신문을 보시는 기준은 별 거 없었습니다. 그게 '보수 신문'이라서 혹은 '진보 신문'이라서, 편집이 예뻐서, 기사들이 좋아서, 뭐 이런 이유 하나도 없습니다. 신문 구독을 하면 선물 혹은 현금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서민들이 그런 이유로 신문 혹은 우유 등을 신청할 겁니다. 이 신문 역시 처음 구독 신청을 하게 된 계기가 현금을 준다고 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아부지, 그 5만원 제가 드릴께요. 아니 5만원 더 얹어 드릴께요. 제발 신문 좀 바꾸시죠."

아부지는 허허 웃으셨습니다. 흠. 아부지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요. 정말 장난 아니라니까요. 전 가난한 아부지보다 이런 정치적인 '이념 공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세뇌 되어 갈 당신이 더 부끄럽다니까요.

이 신문을 보고 혈압이 올랐던 사람이 비단 저 개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중동은 19일치 신문에서 전날 검찰이 공개한 김은희 작가의 전자우편을 ‘피디수첩=반정부 프로그램’으로 낙인찍는 유력한 근거로 적극 활용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필두로
<<조선일보>는 1면 머리기사 ‘100일 된 정권 생명줄 끊어놓고…이명박에 대한 적개심 하늘 찔러’에서 “흡사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정치살인’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내용”이라고 표현했다.
<동아일보> 사설도 “선거를 통해 갓 출범한 이명박 정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대선 불복운동 차원에서 만든 노골적인 정치 프로그램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꼽았다>
식의 보도들이, 많은 네티즌들의 '갑론을박'을 이끌어 내며 이 사태의 여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은희 작가는 검찰과 조선일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지요.

그냥 조용히 추이를 지켜보려 했는데, 이렇게 글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바로 어제 동일한 신문에 게재됐던 '편집자에게' 라는 칼럼 때문입니다. 보통 칼럼은 '본 기사는 본지와 발행인의 의도와 무관함'을 기본으로 실리곤 해야 하는데, 국회의원이자 변호사인 강용석 씨가 작성한 '이메일 공개, 적법(適法)했다'는 제목의 이 칼럼은, 너무도 본지와 발행인의 의도에 힘을 실어주는, 너무도 본지의 의도에 맞게 '주문 제작' 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일부를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명예훼손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진실이든 허위든 사실의 적시(摘示)가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명예가 훼손되어야 한다. 검찰에 의한 이메일 공개(사실 적시)가 있었고 김 작가가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고소했으니 여기까지는 일단 성립한다. 하지만 형법 310조는 "명예훼손의 내용이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검찰의 이메일 공개 내용이 진실한 것이고 오직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면 명예훼손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검찰이 공개한 이메일이 진실임은 김 작가 자신도 부인하지 않고 있으며, 검찰이 수사결과 발표에서 김 작가로부터 적법하게 압수된 이메일을 그의 범의(犯意)와 동기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로 공개한 것은 당연히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검찰의 이메일 공개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검찰의 인권침해"라는 비난은 적어도 이번 사건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요는, 일단 명예훼손은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맞긴 맞지만 검찰은 비난하지 말아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그러했으니? 그 와중에 '일단' '적어도'라는 단어가 굳이 첨가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과연, 대한민국에서 제 할 일 하며 평범하게 살아 온 그리 대단치도 않은 한 여성의 이메일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과연 공공에게 뭔 이익을 가져다 줄까요. 그녀의 이 이메일이 이렇게 까발려진 이후 뭔가 '이득'을 취할 사람은 누가 될까요. 다 떠나 누군가의 잘잘못을 떠나, 권력이 행할 수 있는 움직임치고 너무도 감정적이고 유치한 듯 싶습니다. 국가가 한 개인을 대상으로 이게 뭐하는 짓인가요. 그렇게 개인의 이메일까지 공개해 가면서 방어해야 할 그들의 입장 그들의 사정은 무엇이었을까요. 왜 김은희라는 한 여성을, 모든 국민의 적으로 만들어야만 했을까요. 평범했던 그녀는, 왜 '마녀'가 되어야만 했을까요.

글쎄요, 그 와중에 제일 나쁜 건, '목에 묶인 끈을 핥는 강아지' 놀이 중인 요주의 신문들인 것 같습니다.
정말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답답한 시국입니다. 정치 같은 거, 보수나 진보 같은 거, 그냥 모르고 살게 내버려둬 주면 안될깝쇼? 흠... 일단 아부지 5만원부터 드리고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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