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리운 이름 하나쯤은 있다

수빈's 감성홀 2009. 6. 23. 10:0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누나가 생각했던 게 맞아. 나, 걔 때문에 그 영화 올려둔 거야. 그 아이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좋아했단 이유 하나만으로, 난 혼자서 이탈리아 두오모 성당을 찾아갔어.”

이 제는 안 지 꽤 된, 제가 참 아끼는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우린 6년 전 신문사 인턴을 하면서 서로 알게 됐죠. 처음 만났던 그 때 그 동생은 막 첫사랑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기자 선배들이 시킨 취재를 하느라 바삐 돌아다닐 때 가끔씩 통화하던 여자가 있었어요. 안 지 꽤 오래 된, 한 때 첼로를 함께 배웠던 ‘그저 친구’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 당시 설레며 만나던 사람이 있었기에 제 옆에 인턴 동생이 누굴 좋아하든 관심이 있을 턱이 없죠. 더군다나 잘생기고 돈 많아 보이는(?) 유학파였던 그 친구. 얼핏 ‘오렌지’처럼 보이기도 했기에 그저 그런 누군갈 만나나 보다...하고 넘겨 짚을 뿐이었습니다.

하 지만 가끔... 함께 탄 전철 안에서 그 여자 아이가 정말 괜찮은 여자라고 지나가듯 자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예쁘고, 착하다고요. 그리고 몇 년 쯤 지나 둘은 진짜로 사귀게 되었죠. 한 번 정도는 함께 봤던 기억도 있습니다. 탤런트 지망생이었던 그 여자아이는 나중에 정말로 TV에 나오게 됐습니다. 가끔씩 화면을 통해 보면서도 그저 아 ‘걔가 만나는 여자애..’ 그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endif]--> 시 간이 좀 더 흐른 뒤에 둘은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역시나 동생은 그 사실도 제게 너무나 ‘쿨하게’ 말했죠. 아무렇지 않다는 듯...직장을 외국에서 얻은 동생은 거리가 워낙 멀어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처지에 전 그 동생이 왜 헤어졌는지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마음 속에 얼마나 순수한 감정이 싹트고 있는지...그렇게까지 가슴 저릿한 지 전혀 몰랐죠. 늘 가끔 절 볼 때마다 어설픈 발음으로 ‘누나!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농담 아닌 농담을 늘어놓는 제겐 너무나 귀엽기도 하고 ‘싱겁기도 한’ 동생이었거든요.

그러다 얼마전 동생의 미니홈피에 갔다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아.

우리들에게 일어난 기적은 단지

네가 홀로 기다려 주었다는 거야.

마지막까지 냉정했던 너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마음 속의 허전함을 잊을 수 있을까.

난 과거를 뒤돌아 볼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만 할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려 해

아오이.

너의 고독한 눈동자에

다시 한 번 내가 비치게 된다면

그 때 나는 너를..."

‘냉정과 열정 사이’...책이나 영화를 보셨나요? 바로 한 때는 연인이었던, 준세이가 아오이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어 른이 되고 나서 사랑이 꼭 어릴 때 상상처럼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날 웃게 한 사람이 날 울릴 수도 있다는 것. 때로 둘 사이에 했던 소중한 약속들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꼭 그 맘 때 저 역시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영화가 개봉했단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극장으로 달려간 저였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소설책에 밑줄 쳐 둔 구절들을 되새기며 잠 못 이룰 때가 있습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그 래서일까요? 동생의 홈페이지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발견했을 때 가슴 속에 쿵,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아이의 첫사랑도, 결코 가볍지 않았구나. 나처럼 가끔은 아련하고, 쓸쓸하게 기억되는구나...당연한 얘기지만, 사랑 때문에 아팠던 건, 나만이 아니구나...

그리고 전 물었습니다. “그 영화....첫사랑 때문에 올려뒀지?”

“에이...아니야 누나!”

몇 개월 후 쯤 동생은 고백하더군요. 사실 그 여자애가 좋아하던 영화였다고. 헤어진 다음,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어 준 두오모 성당에 홀로 찾아갔다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그렇게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아무 계산 없이 몸을 실을 수 있게 하는 거라고. 이젠 제법 유명해진 그녀를 TV 화면에서만 보면서 우리의 첫사랑은, 함께 했던 시간은 결국 없던 일처럼 다 끝나버린 걸까 가끔 생각한다고.

전 그 때 깨달았습니다.

‘ 냉정’해 보이는 겉만 보고 ‘쟤가 무슨 사랑을 알겠어?’라고 무심코 생각했지만 누구의 가슴 속에나 그렇게 ‘열정’ 하나쯤 살아 숨 쉰다는 걸. 처음 이별했을 때처럼 가슴에 사무치진 않아도 문득 문득 견딜 수 없을만큼, 왈칵 떠오르는 이름 하나쯤 있다는 걸. 건조체의 뉴스 속에 하루종일 파묻혀 있어 눈물 따윈 없을 것 같은 저에게도 촉촉한 감성은 남아있는 것처럼요.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이문세의 ‘옛사랑’이라는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끝 부분 가사와 ‘냉정과 열정 사이’가 오버랩 되면서 머릿 속이 하얗게...아득해 지네요.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 넘쳐

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에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있네..."

비록 원작의 가냘픈 아오이 역할을 너무 훤칠한 진혜림이 맡은 게 불만이었지만 잊혀진 감성을 살아나게 하는 이 영화, 다시 보고 싶습니다.

가 끔씩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오지만, 이젠 ‘냉정’히 묻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평생을 함께 할 ‘열정의 남자’와 함께 피렌체 두오모 성당을 찾을 수 있겠죠. 그 때는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기를.... 소망합니다.


p.s. 아무래도 맘에 걸려 그 동생에게 네 얘길 써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녀석, 지금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같은 동네에 준세이 역할을 맡은 배우, 타케노우치 유타카가 산다는군요. 영화도 영화지만 꼭 한국 아나운서의 안부를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지요. 이제 말한 지 꽤 됐는데 아직 아무 소식이 없네요.^^ 이 녀석!

* 이 글은 필자가 ‘스포츠 동아’에 짧은 칼럼으로 기고했던 것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못다한 얘기를 담아서요..^^

                                           posted by 조수빈 (KBS 9시 뉴스 앵커,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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