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기행 1. 모스크바의 첫 인상

별별 이야기 2007. 8. 18. 21:56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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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강에 서 있는 피터 대제 동상

러시아에 가기로 마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대학 선배 부부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의 현지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는 선배에게 대충 비비면, 그 생경한 땅을 여행하는 게 한결 안락하고 윤택할 것이라는 계산. 노어는 단 한마디도 못하는데다, 몇년째 세계 물가 1위를 유지하며 호텔 숙박비만도 하룻밤에 70-80만을 호가한다 하니 왠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그 땅에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을 터다.

한편으로 지금은 푸틴의 리더십에 힘입어 초고속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는, '전(前)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 8시간 반 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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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부부가 살고 있는 모스크바의 아파트. 깔끔하고 아늑하다.


300만 원을 웃도는 월세(요건 평균 수준이라고 한다. 선배의 설명에 따르면 요즘 모크스바의 집값은 살인적인 폭등세를 보이고 있다. 마치 70년대 고속 성장기의 한국을 연상케 하는, 이른바 졸부 현상이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를 내고 살고 있는 선배의 집은, 중산층 동네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유럽형 인테리어가 아늑함을 안겨주는 공간이었다. 어쨌든 여기에 짐을 풀고 나니 여행이 예상대로 한결 술술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왠걸! 밤 10시가 넘었는데 해가 지지 않는다! 선배 말로는 이건 약과란다. 아예 해가 지지 않는 때도 있다니, 보드카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잠들지 못하는 밤같지 않은 밤의 연속이 고역이라고. 그의 증언에 화들짝 놀란 나는, 해가 떠 있는 괴상한 심야에 냉동실에 넣어도 얼지 않는, 도수 40도 짜리 보드카 몇 잔을 연거푸 들이 붓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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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름도 따갑다. 그러나 습도가 낮아 한국처럼 후텁지근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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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시민들. 많이 쪼여 놓아야 겨울을 날 수 있어서 그런가? 이들의 햇볕 사랑은 유난하다.

러시아의 여름은 그리 덥지 않다는 말은, 올해만큼은 거짓말이 됐다. 러시아에 온 다음날부터 섭씨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등을 따갑게 한다. 게다가 뭔 놈의 해는 그리 일찍 뜨고 그다지도 늦게 지는지. 하루 종일 내려 쪼이는 뙤약볕에 짜증이 날만도 한데, 러시아 사람들, 오히려 그 해를 즐긴다. 웃통을 훌러덩 벗어 재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공원이나 해변 뿐 아니라 거리 곳곳에서 목격된다. 겨울에는 길게는 한 달 이상 해를 보지 못하는 나라이다 보니, 한 철의 해가 소중하고 고마운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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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마다 있는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조경의 수준이 놀랍다.

그것도 그렇지만 동네 어귀마다 어김 없이 들어서 있는 수십만 평 부지의 공원들을 거닐다 보면 그 규모와 아기자기한 조경 솜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아직까진 일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여기에 서보면 러시아야 말로 웰빙 선진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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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선 짜증나게 더운, 그들로서는 화창하고 아름다운 날씨에 거리 곳곳에서는 방금 결혼식을 마친 신랑신부들이 기념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별도의 예식장이 없는 러시아에선, 결혼 신고소에서 간단하게 식을 올린 뒤, 들러리들을 데리고 여기 저기 다니며 사진을 찍는단다. 그리곤 밤늦도록 에헤라 디여~. 웨딩 사진을 미리 찍는 우리의 풍속과 비교되면서, 간소하지만 제대로 노는 결혼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선남 선녀들의 모습이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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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믈 건너편 건물 옥상에 세워진 '쌤쑹'의 간판이 눈길을 모은다.

모스크바 거리에는 제정 러시아를 초강대국으로 이끈 전제 군주 표트르 1세(피터 대제)의 늠름한 동상과 짜르 체제를 전복시키고 볼셰비키 혁명을 이끈 레닌의 동상이 공존한다. 푸시킨과 차이코프스키의 예술적 향기와 에이브릴 라빈을 앞세운 아메리칸 팝의 현란한 공세가 교차한다. LG와 삼성 등 국내 대기업의 대형 간판 역시 눈길을 잡아 끈다. 시내 중심지에는 롯데 백화점이 우뚝 솟은 채 개장을 기다리고 있다. 고급 외제차가 즐비한 도로에는 벌써 폐차장으로 갔어야 할 차들도 쌩쌩 달린다. 소련 시절에 세워진 사회주의적 계획의 산물, 잿빛 건물 틈 사이로 자본주의적 욕망의 산물인 고급 맨션이 새로운 마천루를 만들고 있다. 옛것과 새로운 것, 보존과 극복의 에너지가 마구 뒤섞인 이곳은 몇마디 묘사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공기를 풍긴다.

모스크바에서의 이틀째 밤, 해는 끈질기게 하늘 한 자락에 붙어 있다. 우리는 또다시 냉동실에서 잔뜩 '히야시'된 보드카를 꺼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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