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3년간, 막장 드라마가 대세를 이루며 안방을 장악했다. 문은아(너는 내 운명), 임성한(하늘이시여)을 필두로 출생의 비밀과 불륜,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의 막장행위가 끝없이 이어졌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여주인공을 괴롭히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라이벌이 악역을 도맡았다. 그러나 지금은 결혼을 반대하기 위해 여주인공을 납치 폭행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어머니가 주를 이룬다. 자식을 사랑해서라고 말하면서도 종종 그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듯 행동한다. 심지어 그녀는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달갑지 않은 며느리로 인해 불행하다고, 그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쾌감에 중독되어 벗어날 의지가 없어 보이는 그녀들. 왜 드라마 속 어머니는 이토록 잔인하며, 자기 파괴적 인간으로 변모하였는가.


임성한과 김수현 그 어디에서..

막장 드라마의 본격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흔히 임성한이 거론된다. 그러나 임성한은 캐릭터보다는 인물의 혈연관계를 막장으로 구성하는데 주력한 작가이다. [보고 또 보고]에서 큰 인기를 얻은 임성한은 유사한 패턴을 반복하며 이러한 형식의 드라마 확산을 부추겼고, 이로부터 유사 임성한표 드라마가 파생되었다. 그러나 임성한의 드라마와 그로부터 파생된 유사 상품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임성한은 갈등의 봉합에 상당히 공을 들이며, 화해 가능성이 파괴되지 않는 것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임성한이 혈연관계를 가히 엽기적으로 뒤섞는 것으로도 모자라 신내림이나 띠 동갑 연상녀와 같은 극단적인 설정을 차용하는 이유는, 악역 캐릭터의 막장화에 강력한 면죄부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주인공을 박해하는 이들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강한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행위는 일말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더불어 임성한은 주인공을 박해하는 주변 인물을 ‘미성숙한 자아 단계’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주인공에게 감화되어 공격성을 포기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임성한의 드라마가 성공하였던 이유는 자극적인 소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자신을 거부하는 주변인들을 포섭하여 자기편으로 만들기가 수월하며(생각이 모자란 어른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쾌감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막장 캐릭터’가 전면화되면 될수록, 갈등의 봉합은 불가능의 영역 아래 사라진다. 임성한의 드라마가 고독한 계몽주의자의 수난사에 가까웠다면 최근의 막장 드라마는 심리스릴러물에 가깝다. 드라마에서 어머니는 여주인공과 아들을 헤어지게 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는 분노를 내뿜는다. 이들은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하려 했다는 이유”로 괘씸죄를 추가해, 여주인공을 박해한다. 과거 드라마에서 악독한 시어머니는 자존심에 상처를 가하거나 모멸감을 안겨주는 방식으로 주인공을 괴롭혔다. 그러나 최근 드라마에서 어머니는 여주인공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고 짓밟음으로써 자아를 파괴할 목적으로 음모를 획책한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주인공의 추방이나 처형이 아닌, 바로 상대가 ‘폐인’이 되는 것이다.

남성 신경증을 앓는 여자들
[미워도 다시 한 번]의 한명인(최명길)은 과연 김유석(선우재덕)을 사랑한 것일까?


이 드라마의 특이성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딸의 징후가 읽힌다는데 있다. 한명인은 명진그룹 한회장이 누구보다 사랑한 막내딸이었다. (어머니의 이미지가 제거된) 부녀관계에서 한명인은 아버지를 이상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그 이미지에 투사함으로써 탈여성화를 욕망한다. 전 생애에 걸쳐 한명인은 <아버지의 아들-계승자>라는 이상을 자신과 아들 민수(정겨운)에게 강요한다.

한명인의 트라우마는 ‘남자들의 세계’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자신을 ‘누군가의 아내’로 만들려 한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그녀는 자신이 마땅히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영역에서 추방당함으로써 아버지와 분리를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를 보완하는 강박증자의 태도를 취한다. 보통의 경우 히스테리는 상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내부의 불만족을 해결하지 않고 지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강박증자는 상대를 소유(종속)함으로써 자신을 보완하며, 불가능한 대상을 욕망함으로써 좌절과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한명인은 김유석이 가난하고 힘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사랑했으며, 그가 죽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절대적인 것으로 포장한다. 김유석이 죽은 사람이었을 때 그는 이상화가 가능했으며, 한명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종속물일 수 있었다. 그러나 김유석은 살아있으며, 한명인의 현재에 개입하려 한다. 결국 드라마는 김유석을 다시 한 번 제거함으로써 한명인의 잠재된 소망을 지속시킨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여러 면에서 김수현의 작품을 연상하게 한다. 김수현은 [내 남자의 여자]와 [사랑과 야망]을 비롯, 여러 드라마에서 남성 자아상에 지배받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내 남자의 여자]의 이화영(김희애)과 [사랑과 야망]의 김미자(한고은)는 한명인처럼 내면에 남성 자아상이 자리해 있다. 이들은 부모에게 자신이 ‘아들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한다. 이화영은 어머니에 대한 강한 저항감과 동질감으로, 김미자는 죽은 오빠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죄책감으로 내적 분열을 겪는다. 김미자에게 있어 박태준(조민기)은 죽은 오빠의 대역이자, 자신의 부모가 소망한 아들의 현시와 같다. 김미자는 박태준과 끊임없이 경쟁하고 그와 자신을 비교하려 든다. 만약 김미자와 이화영이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남성적 자아와 여성적 자아를 통합하고, 부모의 억압으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자신을 탐하는 남성들의 시선과 이를 활용하라고 부추기는 주변의 요구에 굴복함으로써 이들은 부모로부터 이입된 자아상에 고착되고 만다.

막장화된 어머니의 권력

[엄마가 뿔났다]의 고은아(장미희)나 [너는 내 운명]의 서민정(양금석), [사랑해 울지마]의 이영선(이미영)은 표면적으로 행복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 살아왔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해 가정적인 남편과 결혼하였고, 착하고 말 잘 듣는 아들까지 낳아 길렀다. 혹자는 이들이 인생에서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원치 않는 며느리를 들이는 과정이 ‘처음 겪는 인생의 실패’이며, 바로 그 때문에 막장캐릭터로 돌변하였다고 주장한다. 또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에게 아들의 사랑을 빼앗긴데서 온 질투심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들 막장 어머니는, 자아상의 불일치로 고군분투하는 한명인이나 김미자와는 정 반대의 이유로 불행하다. 부모가 제시한 이미지에 순응함으로써 평화로웠던 이 여성들은 가정적인 남편과 착한 아들과 함께 그 평화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환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막상 결혼반대가 본격화되자 남편과 아들은 무능한 존재임이 드러난다. 가정적이었던 남편은 포기를 동반한 현실과의 타협속에 나온 무기력의 이면이며, 아들은 타인에 의한 지배를 당연시하는 약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는 침입자인 며느리에게 혐오감을, 싸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남편에게는 환멸을, 순종적이기만 한 아들에게 실망하며 싸움을 더욱 격한 상태로 몰아붙인다. 그결과 그녀는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그로인해 더욱 불행해진다.

이러한 드라마에 감정이입할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청자는 고난속의 착한 여주인공의 답답함과, 그녀를 사랑하는 부잣집 아들의 유악함과, 잔혹하고 속물적인 어머니 모두를 힐난함으로써 ‘누구누구네 집에 찾아온 불행’을 걱정하는 척 은밀히 향유한다. 드라마에서 여자들은 모두 불행하며, 그 불행의 원인에 집착하기에 또 불행하다.

가족의 화합과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했다는 제작진의 억지주장을 옹호하려는 듯 막장드라마는 어설프게 화해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갈등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녀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불행하리라는 것을.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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