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성기노출이 마케팅이라고?

영화 이야기 2009. 5. 2. 21:32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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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지난달 24일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가 언론 시사회를 열어 첫 공개된 뒤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졌다. 언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시사회는 열렸지만 일반에게 공개되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사회 직후 <박쥐>의 네티즌 평점이 곤두박질친 것이다. 말하자면 1점 세례의 행렬이 이어졌다. 1점을 준 이들이 남긴 단평은 대동소이했다. 한마디로 '성기노출이라는 천박한 마케팅으로 관객을 낚으려고 한다'는 성토들이었다.

이 현상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을 품을 수 있겠다. 첫번째 질문, <박쥐>는 정말 성기 노출을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했는가? 내 대답은 "글쎄올시다"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와 관련해 홍보사가 보내온 30여 건의 보도자료 어느 곳에서도 송강호의 성기 노출을 직접 언급한 대목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당히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꽤 파격적인 내용을 의도적으로 쉬쉬해 왔다는 게 더 적절해 보일 정도다.  

그렇다면 영화사 측은 매우 영악하게도, 영화가 막상 공개된 뒤 생겨날 일종의 '파격 효과'를 노린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도 나는 '글쎄올시다'다. 왜냐하면 영화가 공개된 뒤 배포된 보도자료에서도 성기 노출과 관련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시사회 현상에서 기자들의 성기 노출과 관련한 질문이 잇따르자 영화사 관계자들이 상당히 곤혹스러워 했다는 후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사측이 송강호의 성기 노출을 홍보 포인트로 삼아 관객들을 낚으려 했다는 혐의는 사실 무근이 된다. 이 대목에서 두번째 질문. 그런데도 관객들은 왜 그걸 영화사의 치졸한 마케팅 수법으로 바라보려 한 것일까? 

먼저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하자면, 송강호의 성기 노출을 대서특필한 것은 일부 언론들이다. 시사회 직후 언론들이 포털에 송고한 관련 기사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베일 벗은 '박쥐' 전라에 성기노출까지 '파격' 조이뉴스24
송강호, '박쥐'서 성기노출 열연...관객 충격 아시아경제
박찬욱, 성기 노출 감추고 싶지 않았다
OSEN
'박쥐' 송강호, 성기노출 '파격' "필요한 장면이었다" 스타뉴스
박찬욱 신작 '박쥐' 송강호 성기노출 '파격'
이데일리
'박쥐' 송강호 "성기노출 순교의식이라 생각" 뉴스엔


위에서는 <박쥐> 언론 시사회가 끝난 직후인 4시 반부터 약 30분간 송고된 기사들만을 추려 봤지만 이후에도 성기 노출을 제목으로 뽑은 기사들은 넘쳐 난다. 이처럼 송강호의 성기 노출 상황은 언론들이 '알아서' <박쥐>와 관련한 중요 의제(Agenda), 또는 프레임으로 부상시킨 셈이다. 즉, <박쥐>와 관련한 이후의 담론 구조를 '성기 노출'에 가둬 버린 꼴이니 영화사나 감독, 배우들 입장에서는 결코 달가워할 일은 아니라고 봐야 마땅한 것이다.

사실 관계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이 이를 낚시질을 위한 홍보 수법, 또는 마케팅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스커뮤니케이션 이론 가운데 '제 3자 효과'를 적용해 보면 '나는 성기 노출 마케팅 따위에 낚이지 않지만 제 3자, 즉 다른 사람들은 쉽게 낚일 것'이라고 믿는 경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 질문에 대한 나의 가설은 이렇다.

네티즌들은 영화와 관련해서는 기사와 홍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 즉, 모든 종류의 영화 관련 기사를 홍보 마케팅과 동일시한다는 얘기다. 배후를 들여다 보면 일리 있는 현상이다. 무작정 보도자료를 베껴 쓰는 것으로 생존을 도모해왔던 인터넷 언론의 폐해가 관객으로 하여금 기사를 적정한 거리 두기를 전제로 한 공정성과 객관성의 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사의 홍보 문구를 배달하는 창구 정도로 간주하게 만든 것이다. 관객들의 성급함만을 탓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저널을 입맛에 맞춘 홍보 윈도로 다뤄온 영화사들과 거기에 손쉽게 편승해온 인터넷 언론들의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자,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송강호의 성기 노출은 정말로 마케팅적 필요에 의한 자극용이었을까? 적어도 영화가 개봉된 뒤 나오고 있는 네티즌 평점이나 단평들을 보아하니 개봉전의 상황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그러니까 성기노출이 혐오스럽고 불쾌했다는 평가는 적지 않되, 그걸 낚시용으로 간주하는 시각은 줄었다는 얘기다. (그것 때문에 영화가 불쾌했다고 느끼는 분들이라면 진작 그걸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영화사와 언론들을 탓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알다시피 그런 상황도 아니다. 어쨌든 <올드보이> 개봉 당시 근친상간 설정이 (명백한 스포일러였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영화사에 의해 사전 노출되지 않은 데 대해 네티즌들이 성토를 쏟아낸 것과는 반대되는 상황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따라서 나는, 송강호의 성기 노출을 손님 끌기용이었다고 간단하게 결론내리고 마는 건 여러 정황상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화적으로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지라도 영화의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적절한 '장치'였다고 평가하는 게 옳다고 믿는다. 그의 성기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서 번뇌하던 뱀파이어 사제 상현이 그 자신 성(聖)으로 박제화되는 상황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그를 숭배하는 무리들을 종교적 환상에서 해방시키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장면에서 등장한다. 상현은 여신도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상황에서, 그를 당혹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신도들에게 그의 축 늘어지고 초라한 '자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사실, 한국영화 속의 성기 노출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개봉했던 장률 감독의 <이리>에서도 남성의 성기를 전면에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서적 충격의 정도라면 <박쥐>를 훨씬 능가하고도 남는다. 다만, 그것이 목 매달아 자살한 노인의 것이었다는 게 다를 뿐, 남성의 성기라는 것은 송강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그 때는 조용히 넘어갔던 성기 노출이 왜 <박쥐>에서는 이다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건지 한편으로 우습기도 하다. 과연 누가 천박한 걸까. 어쨌든, 이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싶어 말을 얹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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