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성장한 조직의 내부를 살펴보면, 대체로 4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 1그룹은 조직결성에 참여한 초기 멤버가 주축을 이룬다. 창립멤버로 분류되는 이들은 회사가 이익을 내지 못하는 초창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참여했다는 점에서 동지적 관계를 형성한다. 사극으로 치자면 개국공신 혹은 반정공신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회사가 성공을 거두었을 때 공(功)을 가장 많이 거둬들이는 것도 이들이다.

창립멤버인 1그룹의 노력으로 조직이 일정궤도에 오르면 규모 확장을 위한 인력 유입이 시급해진다. 여유 자금이 부족한 회사들은 이때 열정적이며 경력이 좋은 편임에도, 학벌 등의 조건으로 인해 낮은 임금을 받아온 이들을 채용한다. 이때, ‘회사가 성장하고 있으며, 현재는 높은 연봉을 제공하지 못하나 함께 고생한다면 그 공을 잊지 않겠다’는 인간적인 접근이 독려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회사는 흙속의 진주를 찾듯 알찬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이렇게 채용된 직원들은 자신의 희생에 보답이 있으리라는 기대로 주인의식을 발휘하게 된다. 그들의 열정으로 회사가 성장하면 외부 인사를 초빙해오는 단계가 진행된다. 화려한 경력의 외부 인사에게 높은 연봉을 약속하며 스카우트해옴으로써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한 고비를 넘기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면 조직은 느린 성장기로 돌입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열정은 많지 않으나 이러저러한 경력의 대리급과, 신입사원들을 충원하여 보통의 기업과 유사한 조직구조가 마련된다.

벤처회사의 상당수가 이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 회사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1그룹과 3그룹, 2그룹과 3그룹 사이에서 출현한다. 1그룹은 자신들이 쥐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능력이 출중한 3그룹을 견제하려 한다. 3그룹은 1그룹보다 높은 성과를 제시함에도 막상 중요한 결정 앞에서 대표가 1그룹을 신뢰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제기한다. 2그룹의 경우는 창립멤버만 아닐 뿐 어려운 시기에 낮은 처우를 감수하고 합류했음에도 대우가 1그룹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과, 뒤늦게 참여한 3그룹에게 더 큰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4그룹이 업무에 열정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1~3그룹이 버티고 있는데, 자신의 차례가 언제 오겠는가.

갈등이 장기화되면 2그룹과 3그룹에서 낙오자가 발생한다. 몇 사람은 조직에서 이탈하거나 4그룹으로 도태된다. 살아남으려면 1그룹을 견제할 세력 형성을 위해 2,3그룹이 연합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재편 과정에서 4그룹은 ‘라인’ 싸움에 휘말리고, 운이 없다면 썩은 동아줄을 잡은 채 조직 바깥으로 내몰리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과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김남주)는 조직의 정치적 생리를 간파한 후, 이를 이용하기로 결심한 인물들이다. 장준혁과 천지애는 자신의 바로 윗선과 빚어진 갈등을, 더 높은 윗선을 통해 해결하는 전략을 취한다. 남편의 상사인 한부장 부부와의 갈등을 김이사 부부를 통해 해결하려는 천지애와, 외과과장과의 갈등을 부원장을 통해 해결하려는 장준혁은 그런 면에서 유사하며, 그만큼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하겠다. 

1~4그룹이 나름의 규칙을 통해 안정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는 상황에, 장준혁과 천지애는 ‘조커’를 들고 등장한다.  
‘조커’는 영향력의 정도에 따라 다시 셋으로 구분된다. ‘낙하산’, ‘에스컬레이터’, ‘핫라잇’. 낙하산은 말 그대로 남들이 차례대로 오른 계단을 무시한 채, 중간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지칭한다. 중간과정을 생략하였다는 점에서 유리하나, 그 자체가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어서 오히려 주변의 견제와 소외를 감당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는 남보다 빠르게 승진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주는 배경이 있을 때 가능하다. 핫라잇은 윗선과 연결되어 있으나 그 선이 크게 신경을 써주지 않을 때에 해당한다.

에스컬레이터가 장기적 성공을 보장하는데 비해, 낙하산과 핫라인은 당사자의 처신과 주변인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특히 직속상관과 동료들은 낙하산과 핫라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은데, 이는 단순히 질투의 차원이 아니다. 이들은 낙하산과 핫라인이 조직의 약점을 노출시킬 수 있다는 점과, 그로 인해 조직이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낙하산과 핫라인을 몰아내려 하고 그 때문에 낙하산과 핫라인은 소외되기 십상이니, 윗선과의 친분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윗선과의 ‘친분’이 ‘결속’으로 이어질 전망이 없다면 말이다.

장준혁은 외과과장을 누르기 위해 부원장을, 다시 외과과장 편에 선 부원장을 누르기 위해 의사회회장과의 인맥형성을 도모한다. 천지애 역시 양봉순을 누르기 위해 오영숙을, 오영숙을 이기기 위해 은소현과의 친분확보에 주력한다. 이들의 전략은 자칫하면 자신에게 화를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만약 ‘평강회’ 회원들 중 일부가 천지애 편에 서 ‘세력’을 형성하게 될 경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천지애는 이사부인을 견제하는 대표자의 역할을 떠안아야 한다. 애초에 장준혁은 과장 자리를 노린 것이니 ‘킹’을 쓰러트리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싸움을 시작한 것이지만, 남편의 취직이 목적이었던 천지애는 졸지에 ‘킹’과 싸우는 ‘폰(Pawn)’이 되지 않았는가. 들어가기도 힘든 회사, 시작부터 험난하니 ‘조직원’ 되기 참으로 눈물겹다.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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