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드라마'와 '캔디형 드라마'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주인공이 캔디처럼 명랑활발한가에만 있지 않다. 신데렐라가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새어머니에 의해 신분을 빼앗겼다면, 고아원 출신인 캔디에게 신분의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출신 계급으로 볼 때 캔디는 '빨간 머리 앤'이나 '키다리 아저씨'에 속하며, 신데렐라는 '소공녀'에 가깝다. 신데렐라의 계급상승에는 잃어버린 신분의 회복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신데렐라 드라마는 귀족으로 태어난 자가 다시 귀족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세뇌 시킨다. 주어진 계급적 운명에 순응하라고. 상류층으로 태어난 자가 겪는 부당함과 그들의 몰락을 내 이웃의 불행보다 더 긍휼이 여기라고.


MBC 월화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는 네 쌍의 부부가 등장한다. 김홍식(김창완) 이사와 오영숙(나영희)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커플은 모두 30대로, 엉켜있는 애정사를 과거로 한 채 회사 내 계급관계 속에서 재회한다. 천지애(김남주)는 고교시절 자신의 미모만 믿고 친구인 양봉순(이혜영)에게 모멸감을 주었으며, 그로 인해 연인이던 한준혁(최철호)에게 본의 아닌 상처를 준 채 헤어진다. 그녀는 이후 한준혁보다 좋은 조건이었던 온달수(오지호)와 결혼하지만, 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백수가 되고 만다.  




세 커플의 신분은 태생적 차이를 경계로 삼는다. 허태준(윤상현)과 그의 아내 은소현(선우선)이 재벌가 출신으로 태어날 때부터 상류층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천지애와 온달수는 별 다른 노력 없이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천지애는 빼어난 미모와 더불어 남자를 휘어잡는 능력까지 갖추었으니 특별히 큰 실수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인생에서 실패할 일은 없었으며, 온달수 역시 천재적인 암기력을 바탕으로 큰 노력 없이 서울대 의예과를 입학한다. 반면 양봉순과 한준혁의 경우는 다르다. 한준혁은 과학고-명문대 출신이긴 하나 노력형 수재로, 퇴근 후에도 밤늦게까지 회사 일에 손을 놓지 못하는 인물이다. 양봉순 역시 피나는 노력으로 현재의 미모와 능력을 갖추었으니 이들 부부 역시 닮은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내조의 여왕> 속 인물들은 같은 계급의 상대와 결혼하였다. 재벌은 재벌끼리, 노력파는 노력파와. 천지애와 온달수 역시 큰 노력 없이 성공이 보장된 운명이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피라미드로 위치시킨다면 제일 위에는 허태준-은소현이, 2단계에는 김홍식-오영숙, 3단계에 한준혁-양봉순이 놓이게 된다. 현재 온달수-천지애 부부는 피라미드의 최하층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천지애를 향한 허태준의 마음이, 온달수를 향한 은소현의 마음이 애정으로 발전할 조짐이어서 이들 두 사람의 신분상승이 어떠한 형태로,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 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만약 신분 상승이 이루어진다면 이들은 단숨에 2단계에 위치한 김홍식-오영숙 위에 군림할 수도 있다.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 2,3단계에 올라 선 이들 입장에서 보자면 새치기도 이런 새치기가 없다.

소시민적 시청자라면 재벌가 출신 허태준 부부나 좋은 조건으로 태어난 천지애 부부가 아닌, 노력형 양봉순과 한준혁에게 자신을 대입해야 옳다. 그러나 한준혁과 양봉순 부부에 감정을 이입하기보다는 천지애가 타고난 운명에 맞게 여왕의 위치에 올라서고, 온달수가 뛰어난 머리와 학벌을 인정받기 바라는 심정이 되니, 무엇 때문에 이 노력형 부부를 응원하지 못하는지 궁금해진다. 신데렐라와 소공녀가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너무 오랫동안 세뇌당한 탓일까? 아니면 준혁과 봉순이 과거에 대한 앙갚음으로 지애와 달수를 괴롭히는 것이 쿨하지 못해 보여서인가.

양봉순과 한준혁의 문제는 그들의 노력이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데 있다. 두 사람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바라보느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 삶을 즐기지 못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그 삶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왜 노력하는 자가 불행해야 하는가. 부단한 노력은 왜 콤플렉스의 부산물로 인식되어야만 하는가.


시청자들이 천지애와 온달수를 지지하는 것은 그들이 몰락한 귀족이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 노력을 즐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천지애거나 양봉순이며, 온달수이자 한준혁이다. 잘못된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느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현재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 온 몸에 가시를 두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내조의 여왕>이 지닌 경쾌함은 과거를 후회하느라 허비하기 쉬운 현재를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즐거움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지애와 온달수가 허태준과 은소현의 사랑을 통해 신분을 상승하는 것이야 말로 이 드라마가 걱정해야 할 가장 큰 위험요소라 할 수 있다. (태봉씨가 몹시 매력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고속승진의 지름길을 선택함으로써 '신데렐라 드라마'의 전형을 택할 것인가,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노력하는 즐거움을 잃지 않을 것인가. 이 드라마의 선택이 궁금하다.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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