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달인’에게 부족한 것

늙은소's 다락방 2009. 3. 27. 02:10 Posted by 늙은소

미국에서는 보통 새로운 드라마가 기획되면 파일럿을 제작하여 1차 평가를 거친 다음 6회 정도의 방영을 결정하고, 그 기간의 성과에 따라 1시즌 제작을 결정한다. 그 때문에 어떤 드라마는 1회와 2회 사이에 주인공의 헤어스타일과 캐릭터가 달라지기도 하며, 어떻게든 초반에 시청자를 사로잡아야 1시즌 제작이 보장되는 탓에 용두사미형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한다. 

전형적인 용두사미 미드 중 ‘The 4400’이 있다. 50년에 걸쳐 세계 곳곳에서 사라졌던 4,400명의 실종자가 실종당시의 나이와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혜성과 함께 나타나면서 시작하는 이 드라마는, 4,400명에게 미지의 능력이 숨어있음이 밝혀지며 호기심을 일으켰다. 매 회마다 특이한 능력자가 등장하니, 이러다 4,400회까지 드라마가 끝나지 않는 게 아니냐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여타의 드라마가 염력이나 치유력, 투명인간과 같은 다소 흔한 능력자를 등장시켰다면 이 드라마에서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기이한 능력자가 끊이지 않고 등장하여 재미를 주곤 하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재능이 있는지 간파해내는 어느 교사의 에피소드다. 그녀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은 물론이며, 어떤 악기 어떤 장르가 적합한지까지 알아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능력이 문제가 된 것은 아무리해도 재능이 파악되지 않는 한 소년에 의해서다.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어떠한 재능도 있지 않다는 말을 듣게 된 이 아이는, 자신의 삶이 노동자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재능 없음’을 선고한 교사를 원망하기에 이른다.

소년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 교사의 능력은 분명 매력적이다. 특히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끌어주는 사람을 제 때 만나지 못한 아픔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그 안타까움을 이해하기 쉬우리라.  


SBS 교양정보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볼 때마다 그 교사가 떠오른다. 재능을 눈여겨 봐줄 삶의 스승이 있었다면 그들의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현재 180회를 넘기며 꾸준히 방송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성실한 자세로 한 가지 일에 매진한 결과 남다른 기술을 보유하게 된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생활의 달인’을 시청하다보면 머리가 복잡해져 안타까운 한숨을 내쉴 때가 있다. 저렇게 성실한 사람이 예민한 감각과 손재주까지 갖추고 있다면, 봉투붙이기가 아닌 다른 일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반지 만들기의 장인이 정확하고도 신속한 손놀림은 갖추고 있으나 예술적 감각이 없어 지극히 평범한 금은방 반지만 만들고 있다거나, 예술적 기초지식이 전무한 채 오로지 정교한 기술력만으로 버텨온 도자기의 달인을 보고 있자면 그에게 기초조형 수업을 권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생활의 달인’ 출연자들은 자신의 동료가 30개를 만드는 사이 100개를 만들거나, 남보다 더 정확히 불량품을 찾아내고 똑같은 모션을 반복하여 마치 기계처럼 작업을 수행하는 인물이 주를 이룬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자동화 기계 시스템이 들어오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미래가 가끔은 불안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그들이 ‘생활의 달인’이 된 것은 그런 위태로움을 잘 알기에 남보다 더 많은 일을 처리함으로써 살아남겠다는 의지의 반영이기 쉽다.  


지금 ‘달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동료가 30개를 처리할 때 100개를 처리하는 능력의 과시가 아니다. 빠른 작업 속도로 30개를 처리했다면 70개를 더 작업할 게 아니라, 남은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확보해 재능을 보다 높은 차원의 작업에 사용할 수 있도록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수 있다. 수제가위의 달인에게는 미술관 관람과 디자인전을, 제빵의 달인에게는 제과 장식 관련 해외 잡지들을 몇 권 보내고 싶어진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오만한 계몽주의자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달인’들에게 ‘빠르고 정확한 작업’만을 강조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이 '장인으로 올라서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니겠는가.  

요즘 우리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관리하는 수장께서 내리는 결정을 보고 있자면 ‘생활의 달인’이 절로 떠오른다. 문화와 예술이 효율과 경제성을 중시하기 시작하면 ‘명인’과 ‘장인’은 거꾸로 ‘달인’이 되어야 한다. 똑같은 가격으로 더 많은 작업을 '처리'하기 바라는 그분. ‘생활의 달인’의 열혈 시청자이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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