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위한 메신저

늙은소's 다락방 2009. 3. 7. 10:51 Posted by 늙은소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는 세상이 되니 신문 지면의 부고란 볼 일이 없어졌다. 신문 부고란을 챙겨봤던 것은 아니나, 가끔 정 할 일이 없으면 부고란에도 눈길이 가곤 하였다. 세상을 떠난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목적 보다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신문에 죽음을 알릴 정도인지 그것이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면 조문객은 인맥을 통해 이미 그 죽음을 들었을 것이고, 설령 이를 듣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매일 신문 부고란을 살펴보며 아는 사람의 이름을 목록에서 확인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싶어 부고란의 기능을 의심하였던 것이다.

신문의 부음은 죽은 자가 애써 부르지 않을 대상을 위해 존재한다. 고인의 처남의 부하직원이나 그 아들에게 고급 승용차를 판 영업사원, 혹은 고인의 형제가 운영하는 회사에 자재를 납품하는 업체의 영업담당자에게 부음은 요긴하게 사용된다. 고인과는 생전 얼굴 한 번 본 일 없는데 문상을 가야하는 사람의 심정도 오죽할까 싶지만, 부음을 읽다보면 온갖 이유로 모여든 사람들이 어색하게 절하며 마주보는 풍경이 연상되어 어쩐지 씁쓸한 뒷맛이 든다.

신문의 부음은 죽은 자를 위한다기보다는 장례절차를 밟아야 할 가족과, 장례식장에 찾아올 손님을 위해 존재한다. 그 때문에 신문의 부고란은 '초대장'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죽은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죽음을 알리고 싶은 대상은 전혀 다를 수 있다. 굳이 장례식장에 부르지 않더라도 그저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고픈 대상도 있지 않겠는가. 첫사랑을 버린 채 다른 상대와 결혼하면서도 '나 내일 결혼해' 따위의 오장육부 후벼파는 대사를 남발하는 사람의 심리를 생각해본다면 이해가 조금은 쉬울 것이다. 그러니 죽은 자를 위한 부음이 존재해야 마땅하다. 지정한 상대를 찾아가, 내가 죽었다는 사실과 함께 짤막한 유언을 전달해주는 ‘죽은 자를 위한 메신저 서비스’.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나를 차버렸던 잔인한 옛 연인에게, ‘나 이미 죽었으니, 귀신이 되면 네 앞길 어떻게든 막아보겠다’며 저주의 인사를 남기는 것이 가능하다. 혹은 평생 마음에 짐이 되었던 상대에게 그 고마움을 갚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길 수도 있으리라. 어찌되었든 일가친척과 지인들, 공적 관계의 인사들로 뒤죽박죽인 장례식장의 풍경과는 별개로, 비개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한 줄 인사를 남기는 서비스는 제법 유용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서비스는 20대에 자살을 택한 젊은 죽음과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를 가리지 않고 공평히 대하니, 나이와 지위가 높지 않고서는 이용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신문 부음란에 비해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서비스가 상용화된다면 개인들은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그 죽음을 누구에게 알릴 것인가를 놓고 자주 고심하게 될 것이다. 목록은 지극히 사적이며 내밀한 것이 되기 쉽다. 오지 않아도 될 사람까지 알아서 찾아오는 장례식장의 조문객과 달리, 이 서비스는 나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아무개씨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부고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중학교 시절 자신을 왕따시킨 학교 일진을 찾아가, '너 때문에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남은 생 착하게 살라'는 말을 전할 수도 있다. 혹은 이 여자 저 여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 어느 바람둥이가 그 동안 만난 여자들을 모두 찾아내어 미안했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할 것이다.
생각해보자.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렸으면 하는 대상은 과연 누구인지.


‘죽은 자를 위한 메신저’서비스를 운영하는 기업은 자신들이 사람을 잘 찾아내며, 메시지 전달 성공률 또한 우수함을 강조하며 광고를 펼칠 것이다. 정보가 공개되지 않도록 하는 보안 유지 역시 중요하며, 이를 위해 별도의 보험에 가입하는 고객도 있을 것이다. 유명 연예인이 이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죽음 직후 특정인에게 악담을 퍼부었다는 사실이 새어나갈까 걱정되어 사후 10년 뒤에 이를 전달하도록 하는 ‘메시지전달 예약기능’을 옵션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10년 동안 해당 업체가 부도로 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럴 경우를 대비한 2차 보험 가입을 적극 권장한다. 때로는 수사에 필요하니 부고 전달 목록을 경찰에 넘기라며, 업체와 검찰 간의 마찰이 빚어지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용의선상에 누구를 넣어야 하는지, 평소 원한관계는 어떠한지를 파악하는데 이 목록만큼 유용한 것도 없지 않겠는가.

서비스가 상용화되었을 때를 상상해보자.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인사들은 수시로 찾아드는 부고와 저주의 말을 듣느라 삶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내 죽음을 누구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심하는 한편, 나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려는 사람은 누가 있는지 궁금히 여기게 될 것이다. 우연히 옛 연인의 죽음을 알게 되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지 전달 서비스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실망하게 되지 않을까? 너에게 내 존재란 무엇이었단 말인가!

죽음을 알리고픈 대상과, 반대로 나에게 죽음을 알리고 싶어할 만한 사람들을 떠올리다보니 살아온 삶이 짧게 느껴진다. 원망이든, 미안함이든, 용서가 되었든, 죽은 뒤 남길 말은 길지 않고 허무한 것뿐이어서 지금 죽기에는 삶이 너무 가볍다는 자책마저 찾아든다. ‘죽은 자를 위한 메신저’ 서비스가 상용화된다면 우리는 생에 좀 더 충실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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