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토리노', 노배우의 결자해지

영화 이야기 2009. 3. 4. 13:27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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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온순해진다고 하던가. 예순 살을 귀가 순해진다는 뜻의 '耳順'이라 하는 것도 그런 이유라 하겠다. 허나 현실에서는 반대의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그러니까 나이가 들수록 완고해지고 괴팍해지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다. 가혹한 경쟁 사회를 통과해온 삶의 이력이 그런 성향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 사회에서 젊은 세대를 감싸고 다독이는 어른의 넉넉함을 만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올해 78세의 클
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영화 <그랜토리노>에도 우리로서는 낯익은, 그래서 더 웃음이 감돌게 하는 어느 완고한 노인이 나온다.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 자신도 이제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월트 코왈스키가 주인공이다. 젊은이들의 행태가, 하물며 손녀딸의 옷차림까지 사사건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는, 고해성사를 하라는 젊은 신부에게 '신부학교를 갓 나온 숫총각이 세상에 대해 뭘 알겠냐'며 역정을 낸다. 이웃에 사는 베트남 출신의 몽족 이민들도 눈엣 가시다. 노인의 눈에 시끄러운데다 지저분한 그들은 '더러운 야만인'들일 뿐이다.

옆집에 사는 수줍음 많은 몽족 소년 '타오'가 동네 깡패들의 꼬드김에 못이겨 월트의 재산 목록 1호인 1972년산 그랜토리노 자동차를 훔치려다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 사건은 월트의 인생에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만든다. 타오가 죄값을 치르겠다며 월트의 하인을 자처하게 되면서 세대와 인종의 벽을 뛰어 넘는 소통의 물꼬가 조심스레 열리는 것이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뒤의 얘기를 더 자세히는 못하겠지만, 이 영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우 은퇴작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석양의 무법자> 등의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똥씹은 표정의 미학을 설파했던 그가 자신이 직접 연출과 주연을 맡은 서부극 <용서받지 못한자>(1992)로 일종의 고해성사를 했듯, <그랜토리노>를 통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더티 해리> 시리즈까지 슬쩍 소환하며, 마치 결자해지의 미덕을 수행하듯, 스스로의 배우 인생을 총정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총정리는 거창하지 않고 소박하다.

한국군 참전용사로 영광과 상처(내재된 폭력성과 살인의 기억)를 안고 살아온 월트는, 툭하면 총기를 꺼내 동네 갱들을 혼쭐낸다. 이를테면, 거리에서 몽족 소녀를 희롱하는 흑인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일갈한다. "길을 가다가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지. 그게 바로 나야." <더티 해리>의 그 유명한 대사 "Go ahead. Make my day!(까불어봐, 내 기념일이 될 거야)"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치기는, 한편으로는 힘 빠진 영웅의 '왕년에 내가' 타령을 보는 듯 쓸쓸한 정서를 만들어 낸다.
역설적으로, 이처럼 괴팍하고도 완고한 노인을 통해 자신의 생, 배우로서의 족적, 그리고 거기에 투영됐던 시대의 주름까지 되돌아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마지막 연기를 통해 가장 울림 있는, 배우로서의 유서를 남기고 있는 셈이다.

좋았던 시절의 빛 바랜 회고를 통해 스러져가는 자신을 위무하지 않는 대신, 현재진행형인 폭력의 악순환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이 떠나고 남을, 어린 세대가 살아가기에 여전히 위험천만한 세상을 안타깝게 껴안는다. 그리고는 미안하다고, 너희들에게 이런 세상을 남겨서 너무 미안하다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건 어른의, 그것도 아주 존경할만한 어른의 넉넉한 품이다. 묵직한 경외심이 돋는다. 3월 1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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