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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음식쓰레기 버리는 일로 한 소리 듣고 말았다.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음식쓰레기를 큰 맘 먹고 버렸다는 말을 하니 그 후배가 어찌나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던지... 선배가 말로만 듣던 그런 인간인 줄은 몰랐다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냉동실에 음식은 없었다고 항변해봤지만 나빠진 이미지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썩기 전에 얼려놓는 것이 그리 나쁜 건 아니지 않느냐 설득해봤으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하긴 구차한 변명인 것을 이미 내가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통할 리 없지.

사실 나는 음식쓰레기 버리는 것에 상당한 공포심을 느낀다.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든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람들의 불쾌한 표정을 마주치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건물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음식물쓰레기통 뚜껑을 여는 것이 너무 두렵다.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안에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을지, 쓰레기통 안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나를 끌고 들어갈 것 같아 두려운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안에서 미지의 생명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괴생물체가 오물을 뒤집어쓴 채 나를 덮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며, 조마조마한 심장을 애써 다독였던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통만의 문제는 아니다. 닫혀 있는 진실의 문을 여는 것에도 나는 제법 두려움을 느끼는 편이다. 사귀는 상대에게서 의심스러운 징후가 포착된다 한들 이를 캐묻지 못하니 속으로만 끙끙댈 뿐이요, 벌레가 집안에 날아들면 죽이지는 못하고 큰 그릇을 덮어놓은 채 알아서 죽어주기만을 바라니,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형사는 애초에 글렀으며, 공포영화를 눈 뜨고 감상하지 못하는 것 역시 이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공포영화에서는 왜들 그리 가만히 안 있고, 문이란 문은 다 열어야 하는 것인지!)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공포의 정체는 생각보다 근원적인 데에 원인이 있을 수 있다고 혼잣말로 변명해본다. 사람마다 공포의 대상은 다른 것이니까. 이런 나를 이해해 줄 사람도 어딘가에는 있겠거니.

그런데 몇 년 전 어느 작은 회사에서 일을 할 때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매일 사무실 바깥에서 벌어지는 게 아닌가. 입주가 완료되지 않아 건물 내에 사람이 많지 않았음에도, 화장실만 가면 모든 변기의 뚜껑이 닫혀 있는 것이다. 언제나, 모든 칸의, 모든 변기가. 처음에는 공용 화장실을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부지런하셔서 그러려니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갈 때마다 화장실 변기 뚜껑이 닫혀 있으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청소를 한 직후라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쩌지?’, ‘변기가 막혀 대형 사고가 발생했는데, 뚜껑만 닫아 놓은 채 누군가 도망친 것이면 어쩌나’ 별별 상상을 다 하며, 뚜껑을 들어 올리고 그 안을 확인할 때마다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이르자 도저히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부지런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작은 미스터리를 떠안게 되었다. 내가 화장실을 갈 때마다 바로 그 직전에 화장실 청소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지나친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비워지지 않은 휴지통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여 누군가 고의적으로 각 층의 공용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변기 뚜껑을 닫고 있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누굴까? 그리고 왜?

몇 가지 가능성을 상상해본다. 어쩌면 그는 닫힌 변기 뚜껑 앞에서 흠칫 놀랄 누군가를 떠올리며 작은 장난을 펼치는 중인지 모른다. 혹은 변기에 매우 중요한 물건을 빠트려 이를 건져내느라 고생한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무의식중에 변기뚜껑을 닫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또 다른 가능성으로 키우던 애완동물이 변기에 빠져 익사한 사연이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추측을 해보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 그는 영혼에 상처를 입었고, 그 상흔을 어루만지며 변기 뚜껑을 닫고 있는 것이리라. 한 칸 한 칸 문을 열고 조용히 변기 뚜껑을 내려놓으며, 그는 치유의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몇 달 동안 계속된 변기 뚜껑과의 싸움은 끝내 작은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미해결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누구였을까? 변기 뚜껑을 닫은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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