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는 즐거움

늙은소's 다락방 2009. 1. 9. 00:46 Posted by 늙은소
해마다 5월 5일이면 어머니는 뉴스를 보여주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미아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확인시켜주곤 하였다. 뉴스는 어린이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부모들에게 좋은 위안이 되었다. ‘이런 날 저런 곳에 가는 것은 멍청한 짓이란다.’ 어머니의 주장에 심통이 날 때면 길 잃은 아이들을 향해 이중의 원망을 보내었다. 얼마나 멍청하면 길을 잃어서 다른 아이들까지 놀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고...

스스로를 제법 똑똑하고 어른스럽다고 생각하였기에 길을 잃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던 나는 7살이 되었을 때 길을 잃었다. 동네에서 아이들과 놀이를 하나 만들었는데 갈림길에 이르면 술래를 정한 후, 술래가 눈을 감고 가리키는 방향으로 무조건 간다는 것이 놀이의 규칙이었다. (길을 잃을 작정이 아니고서야 어쩌자고 이런 놀이를 개발한 것인지) 우리는 점점 낯선 동네 처음 보는 갈림길에 이르렀고, 몇 시간이 지나자 청량리 역 주변 길거리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창피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고, 어찌나 겁이 나던지 집 전화번호를 외울 수 있냐는 경찰아저씨의 말에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모르는 곳에는 절대 가지 말라던 어머니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길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는 것이 즐겁다. 특히 서점은 길을 잃기 정말 좋은 장소가 아닌가.

대학에 다닐 때 시간이 남아 할 일이 없으면 중앙도서관에 올라가, “서고 사이에서 길 잃기” 놀이를 하곤 하였다. 서가분류학상 절대 갈 일 없는 분야의 서가에 들어가 ‘대체 이쪽 사람들은 어떤 책으로 공부하는지’ 살펴보고, 왠지 중요해 보이는 책 몇 권을 꺼내 목차를 살펴보는 것이다. 610번대 서고는 의학 중에서도 해부학 책이 여러 권 비치되어 있어, 시신을 촬영하여 제작한 해부학 책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이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철학책에 비견할 수 없는 둔중한 충격을 받게 된다. 340번 서고는 형법에 대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다. 형법 각론과 형법 총론을 비교해 읽어보면 법률 체계가 씨줄과 날줄처럼 구성되어 있어, 어떠한 범죄도 그 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이들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 놀이를 하다보면 건축학에서 영화미술을 발견하거나 민속학에서 성인물을 발견하는 등 뜻밖의 횡재를 만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도서관만 갔다 하면 화장실이 급해지는 병이 있다는 것이다. 평소라면 반나절 이상 참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도서관에만 가면 요의가 찾아와, 들고 있는 책을 내려놓고 화장실을 찾느라 얼굴이 벌게지는 것이다. 7살에 길을 잃었을 때에도 잘 참았던 화장실인데 어쩌자고 도서관에만 가면 이런지... 이 증상은 새 책이 가득한 대형 서점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제법 알찬 헌책방과 소규모 전문서점,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어김없이 등장한다는 특징이 있다.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보물을 책 속에서 발견하겠다는 의욕이 불타오를 때 수반되는 증상인가 싶다. 이런걸 보면 해적선을 타고 보물을 찾아 떠날 팔자는 못되는 게 분명하다. 가는 내내 화장실 타령을 할 게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망자의 함 대신 요강을 들고 다니는 잭 스페로우라니.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 이것은 몇 년 전 서점에서 발견한 것으로, 80년대 주간지 기사 타이틀을 한 곳에 모아놓은 책이다.
도대체 본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이 만큼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이 또 있을까?
이사하며 책장을 정리할 때가 아니고는 이 책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곤 하는데, 어쩌다 펼쳐보면 매번 방바닥을 구르며 짐 싸던 손을 놓고 한참을 보게 되는 이상한 마력이 있다.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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