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신 게 아니냐는 말을 듣곤 했다. 아버지는 살아계셨으나 존재 의미가 늘 희미했다. 그는 지능이 낮은 편이었고 말을 더듬었으며, 생각이 부족했다. 아이였을 때 우리는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에 장애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사춘기에 들어서며 우리 집이 처한 문제의 특수성이 물리적 형태로 가시화됐다.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상징성은 상실되었고, 폭력적인 어머니의 권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우리는 보편적인 아버지상과 어머니상을 획득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지독한 방황을 반복했다.

어떻게 아이는 어른이 되는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 성장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부산물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아이들은 주위의 어른을 흉내 내거나, 혹은 그와 반대로 할 것을 다짐하며 자신의 얼굴을 조각한다. 따르고 본받을 존재가 주위에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주위의 어른으로부터 그들이 쌓아온 삶의 경험과 연륜, 지혜를 계승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로부터 소외된 아이들은 바람에 불리며 풍화되어 온 노인의 곤고함을 먼저 익힌다. 믿고 따를 대상이 부재한 곳에서 아이는 주위의 어른들을 하나 둘 부정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성장시킨다. 때로 그 과정은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아서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고단한 작업이 된다. 이들에게 기성세대는 극복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물론 그로인해 아이들은 보다 진취적이며 혁명적인 사고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것이며, 어둠을 안고 걸어가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두려운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이 두 집단 간의 대립 속에 순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승해야 할 대상이 존재해 그를 보고 따르며 성장한 자와, 극복해야할 대상 속에서 그들을 부정하며 성장한 자. '아버지의 반이라도 닮고 싶다'며 자신의 한계에 절망하는 아들과, '절대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를 외치는 아들의 삶은 다르지 않겠는가. 물론 누가 승자인지, 누가 더 유리한지 답은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땅, 에덴

MBC 드라마 [에덴의 동쪽]은 “자신의 지위를 아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에 계승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상징적 존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신태환(조민기)과 대립하며 계승적 존재로 부각되던 이기철(이종원)은, 탄광에서 이미 사망했다. 동철과 동욱(연정훈)은 아버지를 잃음으로써 승계할 대상을 상실했고, 신태환을 극복의 대상으로 취함으로써 성장의 동기로 삼는다. 신명훈(박해진)에게 있어서도 어른이 되는 과정은 녹록치 않다. 그는 아버지를 계승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일으킨 끝에, 상처 입은 내면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는다.

드라마 [에덴의 동쪽]에는 몇 개의 유사 부자 관계가 등장한다. 동철과 국회장, 오회장과 사위 신태환의 관계가 그러한데, 이들 모두 대립구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사위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이 없는 오회장과, 이동철을 사위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국회장, 또한 친아들(로 알고있는)인 신명훈을 신뢰하지 않는 신태환의 관계는 아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계승시킬 의지가 없는 아버지상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상징을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가 차용하고 있는 제목 [에덴의 동쪽]은 존 스타인벡의 소설로부터 비롯된다.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 아버지들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아들을 끄집어내는 산파의 역할을 수행한다. 구약의 창세기를 현대적으로 적용한 이 소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권력을 놓고 벌이는 대립으로 보지 않는다. 칼렙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내적 결함으로 괴로워하는 고독한 인물이다. 칼렙과 그의 아버지 애덤은 인류가 카인의 후예일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때문에 제거되지 않는 내부의 악과 투쟁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한다. 이들은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원죄의식에 답을 구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드라마 [에덴의 동쪽]에서 아버지들은 자신의 아들을 살해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신태환은 유간호사의 몸 속 아기를 꺼내어 죽이고, 국회장은 사위인 마이크와 자신의 딸이 사랑하는 남자인 동철을 사지로 내몰기만 할 뿐이다. 이 드라마에서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부와 권력을 축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현재를 지향하며, 바로 이를 위해 미래를 소멸하려는 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현재를 지향하는 아버지의 상징으로 ‘크로노스’가 있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1세대 신들의 왕이며,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식들이 태어나는 즉시 바로 잡아먹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의 노력은 아내 레아의 배신으로 좌절되며, 크로노스는 결국 제우스에게 권력을 빼앗기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크로노스의 야심은 다음 세대로의 권력이양을 거부함으로써 미래를 소멸시키려는 의도와 맞닿아 있었다. 이는 시간의 본질에 역행하는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의 영토를 빼앗는 과정을 통해 아버지의 현재를 과거로 추방하는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부정해야 할 대상을 아버지로 둔 아들은 다시 이곳에서 분열한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이 없어 빈곤한 아버지를 둔 아들과, 아버지의 영토를 빼앗고 그를 추방해야 할 운명의 아들로.

* 소설명은 ‘ ’으로, 드라마 명은[]로 표기함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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