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줘서 고맙긴 한데...

TV 이야기 2008. 11. 7. 10:31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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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과 그 틀을 일부 차용한 '패밀리가 떴다'를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낯익고 개성 넘치는 연예인들이 '야생 버라이어티'라는 명분으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서 신나게 한판 노는 상황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일상 탈출에 대한 대리만족을 안겨주고 있는 것도 한 이유일 게다. 1박 2일은 그 안에서 남성들만의 묘한 공동체 의식을 엿보게 만들며, 선남선녀가 유난히 부대끼는 게임을 많이 하는 '패밀리가 떴다'는 우연을 가장한 스킨십의 설렘을 상기시킨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노는 방식은, 내가 대학 시절에 농촌봉사활동이나 MT 가서 하던 일들이다. 십 수 명의 친구들이 역할을 나눠 깔깔대며 밥을 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하고,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배꼽 빠져라 웃어 댔던, 내 스스로 너무 즐거워 어쩔 줄 몰라했던 그 추억을 그들이 되살려 내고 있으니 왜 아니 재미 없겠는가. 그러나 보고 있자면 한편으로는 가끔 씁쓸함이 몰려오기도 한다.

20년 전 쯤만 해도 놀이의 양태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학교 앞 뒷풀이 자리에 가면 늘 노래와 춤, 토론이 함께 어우러졌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들의 놀이를 발라드 댄스, 즉 원시종합예술이라고 부르곤 했다. 지금은 좀처럼 춤과 노래, 술과 토론이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적지 않은 직장인 남성들이 경험하는 룸살롱 문화는 함께 하는 유희라기보다 집단 분열증적 발악에 가까우니 당연히 제외하는 게 맞겠다.)

이제 모두들 술은 술집에서 마시고, 노래는 노래방에 가서 부르고, 춤은 클럽에 가서 춘다. 모든 놀이가 분절화돼 있는 셈이다. 소비 자본주의가 시나브로 놀이의 공간을 분절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놀이는 우리가 관행적으로 돈을 쓰는 동선에 정확하게 짜맞춰져 있다.

호이징가가 인간을 유희하는 존재(호모 루덴스)로 규정한 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모두 원시종합예술에 대한 근원적 향수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와 무용, 그리고 음악이 하모니를 이루며 공동체적 즐거움을 향유하던 그 시절의 미덕, 지금은 사실상 퇴화돼버린 그 집단 놀이의 본능을, '1박 2일'과 '패밀리가 떴다'는 연예인을 매개로 되살려 놓고 전시하고 있는 셈이다. 영리한 제작진은 알고 있는 것이다. 휴대폰 단말기와 닌텐도에 시선을 빼앗기느라 함께 노는 방법을 까먹은 시청자들이, 놀이 마저 '구경하는' 처지에 놓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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