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 장례식, 생중계 마이크를 내려 놓고

민섭's 3M+α 2008. 10. 9. 18:4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 10월 2일 오후 4시. 기자는 마이크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장소는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 입구. 케이블 방송 tvN <E-news>에서 고 최진실의 죽음과 관련한 특집 생방송 프로그램을 준비했는데 기자는 빈소 주변 상황을 전하는 기자 역할로 섭외됐다. 그렇게 처음 든 마이크는 그날 밤 9시, 그리고 발인이 있던 4일 오전 8시, 총 세 차례의 생방송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기자는 마이크와 함께 고 최진실의 빈소 주변을 지켰다. 최대한 엄숙하게 숙연한 현장 분위기를 전하려 노력했지만 장례 절차 일체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이런 상황을 고인이 어떻게 여길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게다가 그 생방송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자니 더욱 그랬다.


고백하지만 고교시절 기자가 가장 좋아한 연예인은 단연 최진실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 새롭게 등장한 심은하에게 빠지기 전까지 무척이나 최진실을 좋아했었다. 당시 최진실은 한 전자제품 CF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해당 전자제품 업체가 달력을 제작했는데 당연히 달력 모델은 최진실이었다. 게다가 여기엔 최진실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사진까지 실려 있었다. 친구 가운데 아버님이 해당 전자제품 업체에 다니는 분이 있어 그 달력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그 친구를 며칠 동안 구워삶아 당시 일본에서 인기 절정이던 한 여성 그룹 싱글 앨범(상당히 어렵게 구했던 것으로 기억됨)과 달력을 맞바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럴 정도였으니 대학을 졸업하고 연예부 기자가 된 뒤 가졌던 첫 번째가 최진실과 심은하 인터뷰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심은하는 이미 활동을 중단하고 있던 상태로 언젠가 활동을 재개하면 인터뷰할 기회가 있으려니 기대했다. 그러나 2001년 그는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그래도 최진실이 있었다. 기자 명함을 들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 그해 겨울 최진실은 조성민과 결혼식을 올렸다. 수습시절이던 2000년에는 유독 큰 사건이 많았다. 주병진이 성폭행 사건에 휘말리고 오현경은 비디오 파문에 휩싸였다. 수습 기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뉴스 사이에서 허덕이던 와중에 최진실, 말 그대로 당대 최고의 스타가 스포츠 스타와 결혼하는 또 하나의 엄청난 뉴스를 접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최초의 비공개 결혼식 주인공이 최진실이었던 것 같다. 결혼식장에 취재진의 출입은 허용했으나 사전에 초대장을 받은 이들로 제한한 것. 수습기자에 불과한 기자에겐 초대장이 없었고 결혼식이 열린 호텔 앞에서 취재를 거부당한 기자는 비슷한 처지의 기자들과 그 호텔 앞 작은 식당에서 낮술을 마셔야만 했다. 뭐 굳이 말하자면 악연의 시작이랄까.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신혼 생활을 시작한 최진실은 가끔 매스컴을 통해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공개했고 곧 큰 아이 환희가 태어났다. 그리고 둘째를 임신했다는 소식도 알려졌는데 그 다음 뉴스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결혼하고 정확히 2년이 지난 2002년 12월 조성민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혼 의사를 밝혔다. “최진실 측에서 나를 간통혐의로 몰아넣기 위해 미행을 하는 등 더 이상 부부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는 게 요지였다. 당시 조성민과 심 아무개 씨 사이의 관계를 의심한 최진실은 이를 확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지만 이 계획은 빚나가고 말았고 조성민이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기자는 엄청난 실망감을 느꼈다. 학창시절 그렇게도 좋아했던 스타가 결혼 이후 최악의 모습을 선보이고 만 것이다. 이혼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배우자를 간통 혐의로 몰아가려 했다는 부분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성민은 심 씨와의 관계를 강력 부인했고 심 씨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이후 2년여의 이혼 공방이 이어졌다. 조성민은 이혼 의사를 굽히지 않은 반면 최진실은 “남편에게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한번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돌아오길 기다린다.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조성민의 주장처럼 최진실이 그를 간통 혐의로 몰아넣으려 했다면 이혼을 거부하는 최진실의 모습이 너무 가식적으로 보였다. 마치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서 이혼하면 이후 연예계 활동에 영향이 있을 것 같아 새로운 핑계를 만들려고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으로 보였을 정도였다.

                   (유작이 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제작보고회 당시 모습)

그러다보니 기자가 쓰는 기사에는 늘 칼이 숨겨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판적인 시각의 수준을 뛰어 넘는 감정적인 기사도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2004년 9월 이혼했다. 만약 최진실이 유리한 상황에서 이혼을 하기 위해 시간을 끈 것이라면 성공적인 셈이었다. 조성민의 폭행이 이혼의 결정적인 이유가 됐기 때문. 폭행당한 최진실의 모습이 매스컴에 공개됐고 심지어 폭행이 일어났던 현장인 최진실의 집 내부까지 공개됐다. 이 부분 역시 이미 색안경을 낀 기자의 눈엔 삐딱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기사는 여전히, 아니 더 날카롭게 쓰이고 있었다.


기자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서일까. 2년여의 공방 끝에 이혼한 최진실은 재기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추락해 있었다. 그럼에도 최진실은 세상의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싸웠고 결국 2005년 8월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통해 보기 좋게 재기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최진실에 대한 기자의 논조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런 기자의 삐딱한 시선을 최진실, 본인도 알고 있었다. 한 번은 최진실과 친분이 남다른 선배 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최진실이 자살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다는 바로 그 여성잡지 기자인데 기자와도 오랜 친분이 있는 사이다. 최진실이 <일요신문>을 보며 불만을 토로했다는 얘기를 전하며 왜 그러냐고 묻는 전화였다. 거듭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에게 최진실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또 한 번은 최진실의 매니저에게도 전화를 받았다. 본래 친분이 있던 그 매니저의 회사에 최진실이 들어갔는데 기자가 계속 최진실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쓰자 불만을 토로하는 전화였다.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있는 그대로 쓸 뿐”이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했던 기자는 한 때 좋아했던 스타에게 가혹해진 스스로의 모습이, 그리고 그 스타가 기자의 기사에 불만스러워한다는 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취재원의 실망스러운 모습 앞에서 기자는 더욱 매서워졌다. 현재 필자는 대학원에서 ‘신문학 세미나’라는 과목을 듣고 있는데 강의를 하고 계신 변상근 선배(중앙일보 논설고문으로 언론계 대 선배인 만큼 ‘교수’라는 호칭 대신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함)께선 이런 심리가 기자로서 당연하다고 얘기한다. 남다른 애정이나 친분이 있던 취재원이라 해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 감싸거나 못 본 척 하는 것이 더 프로답지 않은 기자라는 것. 매우 당연한 말씀이지만 기자의 행동은 이 기준에서 벗어나 있었다.

2007년 9월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조성민이 재혼했다는 소식인데 그 대상은 최진실과의 이혼 공방의 원인이 됐던 바로 그 심 씨였다. 그것도 최진실과 이혼하고 10개월여가 흐른 뒤인 2005년 7월 심 씨와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만 하는 방식으로 재혼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진 것. 혼인신고 시점이 2005년 7월일 뿐 사실상의 부부 관계가 시작된 것은 그보다 앞서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렇다면 최진실과의 이혼 이후 얼마 안 된 시점부터 심 씨와 부부처럼 지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소식을 접한 뒤 기자는 천둥번개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조성민과 심 씨의 관계는 최진실이 말한 것처럼 사실이었던 것. 결국 2년여의 이혼 공방은 최진실의 주장처럼 ‘한번 쯤 남자에게 여자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 기다린’ 기간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는 얘기가 된다. 심 씨와의 재혼을 위해 이혼을 요구하는 조성민에 맞서 끝까지 가정을 지키려 했다는 최진실의 주장이 더 신빙성 있었다는 ‘진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혼을 요구하며 폭행까지 휘두르는 남편을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어 이혼에 이르게 된 최진실의 속내를 전혀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은 기자는 혼자 잘났다고 날카로운 기사만 써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 기자는 그제야 최진실에 대한 기사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최진실의 인터뷰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처음 연예부 기자가 되던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단 본인을 직접 만나 지난날의 오해와 그로 인한 잘못에 대한 사과의 말을 건네고 싶어서였다. 너무 뒤늦어 버린 일일 뿐이지만. 그 즈음 최진실은 새로운 드라마 촬영에 한창이었다. <장밋빛 인생>을 통해 재기한 그를 다시금 최정상의 자리로 올려준 작품이자 유작이 돼버린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이 바로 그 작품이다. 매니저는 드라마 촬영이 끝난 뒤 인터뷰를 하자고 했으나 드라마 종영 이후 최진실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다시 미뤄졌고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끝내 인터뷰는 이뤄지지 못했다. 모두 알다시피 본인이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최진실은 매우 강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니 독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20여 년 전 데뷔 당시의 그는 실제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스로 세상과의 작별을 결심했던 그날 밤에도 그는 강하고 독한 여인이었을까. 많은 이들은 이 부분에 의문점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자살을 결심했을 때에는 더 강력한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는 또 다른 루머를 만들어낸다. 그 누구보다 강해 보이던 그를 막다른 길에 몰아넣은 결정적 계기가 무엇일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한다.


고인이 돼버린 최진실의 빈소 주변을 사흘동안 지키면서 기자는 그가 결코 강한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게도 강하고 독해보이던 그이지만 20여 년의 연예계 생활을 거치며 그 누구보다 나약한 사람이 돼 버린 게 아니었을까, 물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여전히 강한 모습이었지만.


최진실이 우울증으로 힘겨워하며 신경안정제를 투약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그러니까 2003년이다. 2002년 12월 시작된 조성민과의 이혼 공방이 한창 진행되던 상황이다. 기자가 한창 오해의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최진실은 이혼을 요구하는 조성민을 설득해 가정을 지키려, 또 기자와 같이 편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매스컴과 싸우는 데 힘이 부쳐 우울증이라는 질병을 얻었던 모양이다. 우울증이 심해져 신경안정제 투약량을 늘린 시점은 6개월 전, 그러니까 올해 3~4월 경이다.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촬영 후반부 시점으로 보인다. ‘줌마렐라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아줌마 트렌디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연 <내 생애 스캔들>을 통해 다시금 정상의 자리에 오른 행복한 상황에서 최진실은 오히려 우울증이 심해지는 고통을 겪었다. 이미 정상과 바닥을 모두 경험해본 그는 다시 올라 선 정상이 무척이나 외롭고 언젠가 정상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만큼 최진실은 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절친한 동료 정선희가 남편을 잃었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주위 사람의 자살은 매우 조심해야 할 상황이라는 데 그는 ‘최진실 사단’의 수장으로서 장례 절차 전반을 열심히 챙겼다. 그런데 돌연 안재환의 죽음과 최진실이 연관돼 있다는 ‘사채설’과 같은 악성 루머까지 떠돌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던 큰 아들 환희의 첫 번째 초등학교 운동회에 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지인들을 초대하고 직접 김밥 재료까지 챙겼던 그는 자살을 앞두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매니저에게 운동회에 가기 싫다고 얘기했다. 악성 루머로 인해 기다리던 아이의 첫 운동회에도 가기 애매해진 상황에서 엄청난 자괴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미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한 그에게 이런 악재의 연속은 너무나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아무렴 악성루머 때문에 자살을 했겠냐고. 맞는 얘기일 수 있다. 아무렴 천하의 최진실이 한낱 악성 루머 때문에 세상을 스스로 등졌겠는가.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를 괴롭힌 수많은 일들로 인해 그 누구보다 약해져 있는 그에겐 악성 루머는 너무나 치명적인 독이 됐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악성 루머 때문에 자살한 것은 아닐지라도 자살에 이르는 수많은 관문 가운데 악성 루머가 마지막 관문이 됐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기자 역시 그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탓에 빈소 주변을 취재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기자는 그의 장례 절차를 생방송하는 마이크까지 들었다. 담당 PD와의 친분 때문에 거절하기 힘들었고 출연료에 욕심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다만 마음 한편엔 이왕 생중계가 되는 상황이라면 고인에게 미안함을 갖고 있는 기자가 직접 마이크를 들고 최대한 예의를 지키는 방송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대본도 없는 생방송이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대로 해도 생방송이니 여과 없이 방송된다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 화장터 생방송에서 기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여러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예인인 고 최진실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은 악성 루머와 싸우다 결국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바로 지금도 누군가는 또 다른 악성 루머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묘한 시점에서의 자살인 터라 정확한 자살 동기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 이 호기심을 풀어 주겠다며 또 다른 악성 루머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대중의 관심으로 먹고 산다 할 지라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고인에게까지 그럴 순 없습니다. 부디 호기심은 이제 그만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곧 한 줌의 재가 될 고인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의 마음만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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