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시장에 대한 도전이란다. 일견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시장이 좀 달라야 말이지. 뉴욕발 금융 위기가 마치 나비효과처럼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걸 목격하면서, 야, 이거 정말 세상이 도미노구나, 일상적으로 확인하며 산다. 하지만 얄궂게도 우리는 하필 그 도미노의 처음이자 중간이 아닌, 맨 끝에 서 있어서 문제다. 거꾸로 한국의 주가가 폭락했다고 다우존스나 나스닥, 니케이 지수가 눈 하나 꿈쩍 하지 않을 일이니, 나는 아침 신문을 펼칠 때 요즘 자동적으로 국제 경제면을 제일 먼저 들여다 보게 됐다. 내 먹거리는 월가를 주름 잡는, ‘댄디’하고도 ‘쉬크’하게 차려 입은 ‘섹스앤더시티적’ 뉴요커 애들이 쥐고 있다!
그렇다고 자동연산적으로 보아의 미국 진출을 무작정 기대할 일은 못 된다. 경제야 어쩌다 보니 그 지경이 됐지만, 아니 그렇게 생겨 먹게 자라 올 수밖에 없었지만, 문화는 좀 다른 문제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 씩 확인하게 되는, 도미노의 끝에 놓여 있는 우리의 위치를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귀엽기 그지 없는 보아가 ‘큰 시장 넘보러 간다’는 핑계로 우리에게 확인시켜줘야 속이 시원하겠냔 말이다. 돈이야 벌겠지. 하지만 그건 보아와 SM의 돈이지 나의 문화적 자긍심과는 하등의 관련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 땅의 대중 문화는 그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끊임 없이 우리의 주변부성을 환기 시킴으로써 존재 이유를 획득하고 있는지. ‘진출’이라는 단어 뒤에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감히 드러내거나 공유할 수 없었던 문화적 열패감의 그늘이 어른거린다. 앞서 비가 그랬고, 알 켈리랑 친하다고 자랑하는
뜬금 없는 얘기지만 요즘 내가 듣고 있는 대학원 수업 중 한 교수가 1930년대의 뉴욕 풍경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게 1930년대란 게 믿겨져요? 우린 참 한참 뒤떨어진 거죠. 이제 좀 따라 왔을 뿐이에요.” 요컨대, 예술과 인문학을 말한다는 그 교수님의 시야에서도 우리는 쫓아가는 입장이고 저들은 한참 내쳐 달려간 상황이다. 그게 객관적 팩트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조사 빼고는 대명사와 명사는 죄다 영어인 그 강의에서 나는 팩트니 뭐니 참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나는 이런 생각이 기계적인 문화 국수주의는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어진다. 시류를 선도하는 문화적 흐름에 열려 있는 태도와, 그들을 경외하다 못해 추종한 나머지 그들 시장의 논리에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짜맞추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최호
FILM2.0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