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가 맥 빠지는 이유

영화 이야기 2007. 5. 29. 14:16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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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현 감독의 신작이자 송혜교의 변신이 주목된다던 <황진이>를 일반 시사를 통해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그다지 즐기지 못했다. 아닌 영화와 괜찮은 영화로 굳이 나눈다면, 요즘 한국영화에 대한 언론 일반의 응원과 호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머금고 이 영화는 아닌 쪽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강우석 감독이 기획한 시네마서비스 배급 영화들이 왜 자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정면 대결을 펼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아들> vs <스파이더맨 3>, <밀양> vs <캐리비안의 해적 3>, <황진이> vs <슈렉 3>- 용감해 보이는 게 아니라 무모해 보인다.)

우선, 장 감독은 왜 굳이 북한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확고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황진이와 관련한 역사 기록이 알려주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벽계수, 서경덕과 관련한 일화 등) 외에 노비 '놈이'와의 관계를 설정한 북한 소설의 의도는 비교적 자명하다. 기생과 노비라는 똑같이 천한 신분을 공유하는 두 명의 소외된 천재가 계급적 연대와 에로스라는 두 끈으로 묶인다. 신분제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봉건질서에 대한 인민의 저항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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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화는, 황진이의 기예와 기백에 초점을 맞춘 하지원의 TV 드라마 <황진이>에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소설로부터 받아 안은 시대성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해야 하는 부담을 안는다. 그 부담을 수행하는 방식이 '블랙의 반란'으로 묘사되는 황진이의 한복 패션쇼와 미술에 치중하는 것일까? 여러 평가들을 살펴보니, 대충 미술과 의상은 화려하다는 쪽에 쏠려 있다. 영화를 보니 과연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게 이 영화의 방향성과도 핀트가 맞지 않을뿐더러 미술에 공을 들여온 최근 사극 영화의 흐름에 비추어 크게 변별력을 가질 정도도 못된다고 생각한다. (미술은 <스캔들>이 훨씬 더 훌륭했다.)

이 말은 미술이 훌륭해서 영화가 꽝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미술만 훌륭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미술에 한해 면죄부를 줄 일도 아니다. 나는 왜 한국의 사극은 늘 화려하고 세련된 복식과 세트를 강조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16세기 조선의 민초들, 그 가운데 화적떼 두목으로 나오는 유지태는, 그 시대에도 치아 미백과 스포츠센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SF적 가정을 얼굴과 몸으로 웅변한다. 민중들은 갓 사우나에서 나온 듯 피부가 매끈하고, 옷도 깔끔하다. 손톱에 덕지 덕지 떼가 끼고, 이는 태어나서 한번도 양치질을 안한듯 누렇다 못해 시커먼, 잭 스패로우는 괜히 그렇게 묘사된 것일까? 떼구정물로 목욕을 한듯한 <킹덤 오브 헤븐>의 십자군들도 기억날 것이다. 똥과 진흙 투성이로 가득한 <여왕 마고>의 16세기 파리는 또 어떤가. 가까이는 <하나>의 꾸질꾸질한 빈민촌 사람들도 있다. 이런 디테일이, 화려한 비주얼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의 사극에는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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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마고> 1994, 파트리스 쉐로 감독, 이자벨 아자니 주연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시대극으로 기억되는 <여왕 마고>는 인물과 공간을 통한 시대성의 묘사 방식에 대한 나름의 정답을 제시한다. 별 게 아니다. 디테일에 충실할 것. 영화의 의도를 분명히 밀고 나갈  것.

<황진이>는, 봉건 제도의 모순에 직면한 백성의 저항을, 사대부의 입으로 지껄이고 있는 듯한 영화다. 그러다 보니 이 얘기를 하려다 저 얘기에 빠진다. 대사는 붕 떠 있고, 굳건한 의지가 실리지 않은 편집은 자주 길을 잃어 관객의 감정선을 뚝뚝 끊어 놓는다. 맥이 빠진다. 송혜교의 변신 하나 건지고 나오기엔 140분이 너무 길어 맥 빠지고, 초강력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적하기엔 포스가 형편 없어 맥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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