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역사에서 올해만큼 시대극이 많이 개봉했던 적이 있었던가? 연초 각각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은 <귀향>과 <동주>가 의미 있는 흥행 성적을 거둔 데 이어 지난 여름에만 <아가씨><봉이 김선달><인천상륙작전>(희대의 졸작인 이 영화가 700만을 넘어선 건 정말 불가사의다. 하긴 이 나라에서는 심형래의 <디워>조차 700만이 넘었다.)<덕혜옹주> 등의 시대극이 잇따라 개봉했다. 이런 기세는 추석 연휴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과 강우석 감독의 신작 <고산자: 대동여지도>까지 추석 특수를 노리고 극장가에서 맞붙는다. 그야말로 시대극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초반까지 시대극은 충무로에서 일종의 금단의 열매와도 같은 것이었다. 독이 든 사과라는 예가 더 적절할까? 그만큼 그 이전에 시도된 시대극 가운데 흥행에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징크스는 깨지라고 있는 법. 이준익 감독이 ‘시대극은 안된다’는 불문율을 깨뜨린 주인공이 됐다. 코믹 시대극 <황산벌>이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 뒤로도 기획자들은 시대극을 만드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스크린으로 옮기며 나란히 천만 관객을 돌파한 뒤에야 비로소 ‘과거를 재연하는 것이 먹힌다’는 감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넘기면서 시대극의 전성기를 예고했다.


사실상 지금까지 천만을 넘긴 한국영화 가운데 시대극의 비중은 꽤 높다. 14편 가운데 8편이 가깝게는 80년대(<변호인>), 멀게는 조선 중기(<명량><광해: 왕이 된 남자>)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다. 그런데 이런 시대극의 전성기 안에서도 건드려선 안되는 금지 구역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일제 강점기이다.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해일과 김혜수가 출연한 <모던 보이>나 지난해 이해영 감독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았다가 처참하게 흥행 실패했다. 이 징크스 역시 누군가 깨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나타났다. <암살>의 최동훈 감독이었다.


영화 <암살>은 친일파 처단이라는 한국 근현대사 미완의 숙제를 영화로나마 통쾌하게 해소시킨다.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라는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의 대사는, 우리의 해방이 그저 강대국간의 전쟁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는 열패감을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설치된 반민족행위자특별위원회(이른바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자 안옥윤은 직접 친일파 처단에 나선다. “16년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이 한 마디 대사는 미처 이루지 못한 친일파 청산에 대한 응어리에 대해 영화가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위로였다. 실제로 최동훈 감독이 이 영화를 기획한 데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패배 의식을 극복하기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액션 활극의 틀을 빌어 솜씨 좋게 자신의 목표를 이뤘다.


이런 한편, 지난 여름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는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덕혜옹주의 골곡진 삶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재연하려는 영화의 시도는 이른바 영화적 드라마 라인을 만들기 위해 사실과 다른 부분을 억지로 구겨 넣는 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그녀가 한글 학교를 운영하려 했다든가, 조선인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라는 말을 했는지 등의 사실 여부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이 영화의 역사 의식에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이다.


나는 대한제국을 미화하거나 옹호하는 모든 시도를 반대한다. 대한제국은 국권을 일본에 넘긴 매우 무능력한 봉건 왕조였을 뿐이다. 영화가 그려낸, '최후의 황녀'라는 이름으로 수식된 덕혜옹주의 굴곡진 삶 속에는 그런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 있지 않다. 역사에 가정이란 건 없지만, 만약 대한제국이 서양처럼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 공화정으로 바뀌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랬어도 덕혜옹주의 삶이 허망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건 모든 봉건 왕조의 비극이다. 그걸 일제 강점기라는 기왕의 시대적 비극을 볼모 삼아 재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대한제국은 열강에 포위된 조선왕조 최후의 발악이었다. 그리고 상해에 거점을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 이후에 왕정복고가 아닌, 공화정을 추구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진실이다. 덕혜옹주는 그 역사적 격랑에 휩싸인 비극적 개인, 그냥 그 개인일 뿐이다. 그런데, 그 역사적 격랑에 휩싸여 절망을 맞은 개인들은 그녀 말고도 무수히 많다. 무수히, 무수히 많다. 일제 말기에 징병당해 필리핀에서 포병으로 싸운 내 아버지의 이야기도 한편의 영화이지만, 영화로 만들어질 수 없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 영화로 만들어지려면 국권을 빼앗긴 허수아비 황제(고종)가 그 와중에도, 환갑을 앞둔 나이에 궁궐 나인과 섹스를 해 태어난 딸쯤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추석 특수를 노리고 개봉하는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특기인 누아르적인 쾌감을 위해 일제 강점기의 시대 상황을 동원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동원’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 역사의 아픔 속으로 감독이 더 깊이 천착해 고민한 흔적이 영화 내내 목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독 김지운은 의열단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끌어오면서 이정출이라는 허구의 친일파 경찰을 앞세운다. 그리고 그가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에 의해 포섭돼 얼떨결에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되는 상황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다.


이 영화의 대립 구도는 정확하게 말해 ‘조선인 vs. 조선인’이다. 이정출은 처음에 김우진과 대립하며, 나중에는 그보다 더 악질적인 친일파 경찰 하시모토와 대립한다. 이런 가운데 의열단 안에 밀정이 있다는 의심이 퍼지면서 폭탄을 상해에서 경성으로 운반하려던 김우진의 미션은 더욱 복잡하게 꼬여만 간다. 누가 배신자인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상황은 스파이 영화의 단골 소재다. 김지운은 그렇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파이 영화와 어둡고 음습한 누아르 풍의 영화를 추구했고, 일제 강점기는 그의 영화적인 야망을 위해 불려 나온 것이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독립군 박희순이 일본 경찰에 둘러싸인 채 총 맞은 자신의 발가락을 억지로 떼어내는, 이해 되지 않는 황당무계한 장면이 뜬금없이 들어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한마디로 김지운에게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속하지 않았던 세계이며, 오로지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시공간인 것이다. 이것이 영화 <밀정>이 <암살>에 미치지 못하는 결정적인 대목이다. 물론, “알려줘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안옥윤의 선언과 같은 패기는 이 영화에 없다. 김지운의 일제 강점기는 여전히 패배의 습한 늪이다.


나는 이것을 역사 의식의 부재라고 부른다. 물론 감독은 재미도 있고 흥행이 잘 되는 영화를 내놓으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밀정>은 꽤 손님이 들 것이다. 역사의 진실보다, 감독이 깊은 고민 끝에 토해내는 역사 의식의 숭고미보다, 송강호와 공유를 보고 싶어 선택할 이들이 더 많을 게 분명한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김지운의 전작 <달콤한 인생>만큼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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