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그야말로 편견일 뿐이다. 지난 2014년 말에 개봉한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다큐멘터리로선 전무후무한 48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앞서 2009년 새해 벽두에 개봉한 <워낭소리> 역시 293만 명을 동원했다. 두 작품 모두 웬만한 상업 대중영화 못지않은 흥행성과를 거둔 것이다.


무엇이 이들 다큐멘터리에 이토록 많은 관객들이 몰려가게 했을까. 답은 단순하다.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감동을 얻는 것은, 그것이 극영화이든 다큐멘터리이든 중요하지 않다. 아니,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더욱 생생한 날 것 그대로의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 그야말로 백년해로할 때까지 서로를 끔찍이 사랑했던 노부부의 사랑(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노동을 통해 교감한 시골 할배와 늙은 소의 우정(워낭소리)은 그 자체로 깊고도 보편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며 감동을 선사했다.


현실 고발을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비록 우리나라의 사례는 아니지만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의 작품 <화씨 911>은 미국 개봉당시 다큐멘터리 사상 최초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911테러를 빌미 삼아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부시 행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이 영화는 부시 행정부 시절에 개봉해 흥행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당대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적 외교 노선에 대한 반감을 작품이 수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무어는 4년 뒤, 미국의 민영 의료 보험 체계가 어떻게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 빠뜨리고 있는지를 고발한 <식코>로 또 한번 미국의 견고한 시스템을 향해 돌을 던졌다.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한다고 해서 마냥 설교조인 것만은 아니다. 마이클 무어는 특유의 수행적 양식, 그러니까 어떤 엉뚱한 미션을 수행하는 방식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쉽고도 명쾌하게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대가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그 자체로 상당한 재미를 안겨준다. 그리고 사람들을 설득한다. 어쨌든 미국은 <식코>가 개봉한 이듬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당선시켰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전국민의 건강 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이른바 ‘오바마 케어’를 실현시켰다.


앞선 사례들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다큐멘터리도 극영화 못지 않은 재미를 안겨준다. 
둘째, 다큐멘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뉴스타파 최승호 피디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자백>도 그런 점에서 앞서 말한 두 가지 미덕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다큐멘터리에는 많은 양식이 존재하는데, 다큐멘터리 연구가 빌 니콜스에 따르면, 시적, 설명적, 참여적, 관찰자적, 성찰적, 수행적 양식이 대표적이다. 이런 양식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을 여기서 늘어 놓을 생각은 없다. 나는 다만, <자백>을 극영화에 해당하는 장르적 구분으로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규정한 이 영화의 장르는 ‘미스터리 추격 스릴러’다.


화교 출신의 탈북자 유우성 씨가 서울 시청에서 근무하던 중 국정원에 의해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그는 검찰에 간첩 협의로 기소된다. 그리고 뒤이어 탈북한 그의 여동생 유가려 씨 역시 국정원의 조사에서 오빠가 간첩 행위를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실토한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뉴스나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팩트’라는 것이다. 그러나 팩트가 곧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탐문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째, 유우성 씨는 국정원이 주장한 대로 간첩 행위를 한 게 맞는가?
둘째, 여동생 유가려 씨가 국정원에서 진술한 내용은 사실인가?


자,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이제부터 제작진은 이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을 풀어내기 위한 탐문에 나선다. 제작진은 유우성 씨의 간첩 혐의가 국정원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국정원과 검찰이 내세운 증거들을 하나하나씩 검증해 나간다. 놀랍게도, 유우성 씨가 북한을 방문해 보위국의 지시를 받았다는 국정원과 검찰의 주장이 억지임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조작 증거가 발견된다. 결국 유우성 씨는 대법원 판결을 통해 간첩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왜 동생인 유가려 씨가 국정원 조사 과정에서 오빠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는 거짓 자백을 했을 것이라는 미스터리가 남는다. 영화 <자백>은 유가려 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미스터리를 풀어 헤친다. 강압과 회유. 그렇다. 우리가 짐작하는 바대로 유가려 씨는 거짓 자백을 하면 오빠와 함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국정원의 회유에 속은 것이다. 이렇게 국정원은 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증거들을 조작하거나 짜맞추었다. 그리고 검찰은 국정원의 방침대로 그들을 끝내 간첩으로 만들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만약 <자백>이 유우성 씨와 관련한 하나의 사건을 추적해 진실을 드러내는 데 그친 것이라면, ‘훌륭한 작품’이라는 표현을 쓰는 데 인색했을 것이다. <자백>이 이뤄낸 탁월한 영화적 성취는, ‘간첩 조작‘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국가 폭력을 구조적으로 파헤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조작에 앞장 섰던 당사자들에게 끈질기게 따라 붙으며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돋는 대목은 바로 이 지점이다. 최승호 감독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따라 붙을 때, 그는 우산으로 자신을 가린 채 묵묵부답이다. 이때 카메라 감독이 그의 우산을 번쩍 들어올릴 때, 그 무고한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려던 최종 책임자는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장면이다. ’늬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고 선언하는 듯한, 대한민국 권력의 민낯이 그렇게 상징적으로 그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 간첩 조작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도 마찬가지다. 당시 그가 간첩이라고 밝혔던 이들은 모두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렇다면, 왜 간첩도 아닌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었을까. 최승호 감독은 미침 일본으로 떠나는 그의 앞에 나타나 당시 그가 저지른 일에 캐묻는다. 그러나 그 역시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한다.


영화 <자백>은 “어떤 세력이 무엇을 위해 무고한 이들을 간첩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추적 보고서와도 같다. 그리고 추적의 영상 기록은 정말 오싹하다. 그 어떤 공포스러운 미스터리 추격 스릴러보다 더 오금이 저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스크린이 만들어낸 가공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문을 나서면 우리가 마주쳐야 할 세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고, 어쩌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공포는 우리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하는 걸 넘어, 매우 현실적인 공포를 안겨준다. 그런데 그 공포는 각성을 전제로 한다. 즉, 영화 <자백>은,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그러려니 한, 어쩌면 거의 완전히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었던 일들을 재구성해 보여줌으로써, 공포와 각성을 동시에 안겨준다. 그 공포와 각성의 의미는 최승호 감독이 제작 과정의 체험을 증언한 이 말로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공포를 다스리며 한 발 한 발 걸어 온 3년이었다.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을지, 무슨 일을 할지 몰랐다. 어쨌든 겨우 여기까지는 왔다. 모두 손 잡고 저 마지막 공포의 벽을 넘어갔으면 좋겠다. 우리 내면의 공포의 벽을 넘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자유로울 수 없다.” <자백> 최승호 감독


이제,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미스터리 하나가 더 남는다. 그들은 왜 간첩을 만들어내는가? 아니, 그들에게 왜 간첩이 필요한가. 나는 여러분이 이 영화를 통해 그 미스터리를 함께 풀어 보기를 권한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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