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하실래요?

애경's 3M+1W 2007. 10. 10. 01:4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3M흥업의 새 필자 '웃긴 고양이('얼루어' 김애경 피처수석)'의 데뷔 포스트입니다.(운영자) 필자 소개


첫 등장치고는 좀 껄끄러운 주제지만, 첫 등장이기에 좀 센 놈으로 준비한 주제는 바로 '동거'에 관한 잡담이다. '그 때 그 분'과 아직까지는(!) 별 탈 없이 살고 있어서 할 수 있는 커밍아웃일 수도 있겠지만, 스물 아홉 그리고 서른 즈음의 난 '동거'라는 걸 했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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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나날을 보냈던 그 시절, 그 공간



동거 했었다고 말하면 공통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 있다. “동거할 때가 좋아요, 아니면 결혼해서가 좋아요?” 당연히 후자다. 모든 공문서에 ‘기혼/미혼’ 외에 ‘현재 동거 중’이라는 선택 사항이 추가되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의 동거는 강산이 변하거나 말거나 지금과 다름없이 그다지 유쾌하거나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왜? 득보다는 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목적이 명확하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현재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성행 중이라는 ‘룸메이트 개념의 동거’라면 생활비 절약의 장점 정도는 분명히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론 보디가드가 되어주고 또 때론 섹스 파트너도 되어주니, 개인의 니즈(needs)에 따라 그때그때 유용할 수도 있겠다. 헌데 이건 ‘동거가 연애보다 좋은’ 이유이지 ‘동거가 결혼보다 좋은’ 이유는 될 수 없다. 동거가 결혼보다 좋은 이유? 글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것이 내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일 게다. 딱히 동거가 결혼보다 좋은 게 없어 보였고 ‘이렇게 살 바에는 그냥 결혼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뭔가 개운치 못하고 늘 찜찜한 마음, 세금 안 밀리고 성실하게 살면서도 뭔가 죄 지은 기분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심리적인 공황에 대한 얘기는 차치하자. 하지만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동거의 구조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이는 것보다 새는 것이 더 많다. 그것이 감정적인 것이든 금전적인 것이든 간에 말이다.

우선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자. 일단 살아보고 아니다 싶으면 헤어질 수 있으니 동거는 편리하다? 글쎄. 동거 시절, 한번은 정말 크게 다퉜다. 부서진 리모컨이며 액자 유리들의 잔해를 처리하는 데에만 반나절이 걸릴 수준의 전투를 벌였으니, 그 때는 ‘저 인간과 하루라도 더 살면 우리 부모는 개고 나는 개자식이다’라는 심정이었다. 마지막 선전포고를 앞둔 채 그의 퇴근을 기다리며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이상하게 지펠 냉장고가 눈에 밟혔다. 동거 1년 차 즈음 보증금 높여 이사하면서 큰 맘 먹고 구입한 냉장고였다. ‘지금 헤어지면 저 냉장고는 어떻게 해야 할까… 중고로 팔면 똥값인데… 그냥 버려?...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을까?... 냉장고 바꿀 때 진짜 기분 좋았었는데….’

자식들 핑계로 이혼을 주저하는 가정주부처럼, 그날의 난 냉장고 때문에 ‘헤어지겠다’는 생각을 보류했다. 우습다고? 하지만 냉장고는 그냥 냉장고가 아니었다. 그와 내가 함께 했던 시간, 추억, 역사였다. 결혼한 것도 아닌데, 고작 2년 여의 시간을 함께 했을 뿐인데, 집안 곳곳에 온통 그런 시간, 추억, 역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서류 상에 줄 하나 안 그어진다 뿐이지, 동거하다가 헤어지는 것 역시 이혼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이었다.

또 하나. 결혼해서 이혼하는 것보다는 미리 살아보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이 보다 ‘안전빵’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10여 년 연애하고 2년 여 동거를 했지만, 결혼하고 나니 ‘아니 이 사람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라는 새삼스러운 대목들이 새록새록 발견되더라. 결국 동거를 통한 검증이 이혼사유가 될 만한 치명적인 오류들을 완벽하게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동거는 동거일 뿐, 결혼생활이 아니다. 따라서 동거 상황에선 불만을 가질 수 없다거나 눈 감아 줄 수 있는 성격의 일들이 결혼 이후엔 날밤 새고 전투를 벌여야 할 만한 치명적인 사안들로 둔갑한다. 동거와 결혼은 현저히 다른 규모의 플레이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수준 차이 나는 게임이며 적용되는 룰 또한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동거가 좋은 이유는 하나도 없을까? 세상의 모든 경험들이 유의미한 것이라고 가정할 때, 얻은 것은 분명 있었다. 해보지 않았다면 난 결코 동거중인 후배에게 “이제 그만 결혼하지 그래? 결혼식 비용? 일단 저지르면 다 해결된다니까”라며 부추길 수 없었을 테고, 동거를 시작한다는 업계 홍보녀 K에게 “처음부터 이것저것 다 사지 말아요. 웬만하면 얻어 쓰고 집 꾸미는 거나 집안 물건들에 너무 공들이지 마세요”라고 조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 지펠 냉장고 하나 때문에도 못 헤어지는데 결혼한 이후엔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마음에 들러붙겠나 싶어서, 발끈하는 사안에도 보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대처하게 됐다. 동거 기간 동안 축적된 경험치, 그런 배움과 깨달음이 바로 동거의 장점 아닐까. 굳이 물어보신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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