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퍼모어 징크스'라는 말이 있다. 스포츠계에서 자주 쓰는 말로 데뷔 첫해에 우수한 성적을 낸 선수가 2년차에 슬럼프에 빠지는 현상을 뜻한다. 그런데 영화계에도 이 징크스가 간혹 발견된다. 그러니까 성공적인 작품을 내놓은 뒤, 다음 작품에서 죽을 쓰는 경우다. 이를테면 <추격자>로 흥행과 평단으로부터 모두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던 나홍진이 <황해>에서 죽을 쓰고, <의형제>의 장훈이 <고지전>으로 별반 신통치 않은 평가를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는 남자>의 이정범도 마찬가지가 될 것 같다. 비록 전작인 <아저씨>가 그의 데뷔작은 아니었지만, 그 후광에 힘입어 이번에는 장동건을 캐스팅한데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꽤 국제적인 스케일에 맨몸 액션을 넘은 총격 액션으로 진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실패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표면적인 이유로, 그리고 약간 우스개를 섞자면 장동건이 원빈처럼 웃통을 벗어던지며 찰진 근육을 과시하지 않은 건 여성 관객 100만 명쯤은 잃을 패착이다. 왜냐면 <아저씨>도 그랬지만 명백히 홍콩 누아르의 세례를 받은 그의 작품들은 흔히 '마초 로맨티시즘'이라고 부르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에, 마땅히 여성 취향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아저씨>가 크게 흥행에 성공했던 것은 역시 원빈이 남성의 몸에 대한 여성들의 관음증을 충족시킨데다, 가련한 소녀를 구하는 단순 명료한 스토리 라인이 역설적으로 스타일리시한 액션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는 남자>는 <아저씨>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면서도 답습을 넘어 진화하려는 노력이 지나친 나머지 과잉이 돼 버렸다. 이 영화 역시 이정범이 천착하려는 건, 아파트 총격전이 입증하듯, 둔탁하고도 팽팽한 액션의 긴장감이다. 총격 액션을 멋있게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야망이 넘실대고 출렁인다. 따라서 어찌보면 이 영화의 모든 서사적 틀은, 이 액션을 빛나게 해주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식물이 쓸데 없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아저씨>처럼 단순 명료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영화는 왕가위와 오우삼 사이의 어느 지점 쯤에서 어정쩡하게 폼을 잡고 서 있다가 <다이 하드> 흉내를 내고는 <첩혈쌍웅>처럼 끝난다. 그 폼은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