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의 속물성

별별 이야기 2013. 9. 4. 05:56 Posted by cinemAgora

박숙자 씨가 쓴 <속물교양의 탄생>(푸른 역사)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책 내용 중에 식민지 근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재가 중요해진 배경과 관련해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고급스러운 장정, 엘리트가 읽을만한 서적 등 교양의 속물화에 따라 명작의 소장 가치가 중요하게 부상한다. 교양이 물신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가 바로 서적이 소장 가치로 변화되는 것이다. (중략) 이렇게 될 경우 책을 구매하는 행위, 소장하기 위한 일차적 행위에서 만족이 이루어질 수 있다. 명작을 통해 기대했던 자신과 세계를 이어주는 현실에 대한 성찰이나 의미 공유 대신 명작을 소장하는 행위를 통해 명작에 기대했던 욕망은 일시적으로 채워진다. 이 '소장 가치'는 물신화된 상품 목록처럼 기능하기 때문에 계급적, 문화적, 경제적 능력을 드러내는 기호로 둔갑한다."

책에 따르면 '서재'는 원래 학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지식의 공유 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식민지 시대를 통과하면서 '책을 소장하는 사적인 공간'으로 그 의미가 변질된다. 그 목적은, 저자가 지적하듯, 교양을 지녔음을 드러내는 속물적 기표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 욕망에 발맞춰 식민지 시대의 언론은 '명사의 서재' 따위의 기획을 많이 했다. 요즘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요컨대, 그의 생각이 아닌, 그가 가진 책이 그를 대신하는 현상이다.

서구인의 것을 닮으려 했던 일본의 근대적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이 그대로 이식된 조선의 식민지 근대, 이런 속물 욕망이 비단 '소장'이라는 행위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전히 우리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통찰 안으로 번역되거나 해석되지 않은, 그저 "누군가의 명저를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교양을 뽐내려는 욕망이 꿈틀댄다. 가시적 소장은 아니더라도 이 또한 정신적 소장 행위인 셈이다.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유명 예술영화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줄줄 꿴다.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영화를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잔뜩 폼을 잡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공유'가 없다. 동시대를 읽어내려는 지적 통찰의 공유야말로, 지식인의 일차적 소명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가 읽은 책"이나 "내가 본 영화"로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려 한다. 처음부터 그 목적이 사적 소장, 속물 교양의 과시에 있기 때문이다. 그 '있어 보이려는 욕망'에는, 처참하게도, 식민지성이 아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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