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바람부터 서둘렀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악명 높은 표구하기 전쟁은 아이디 카드를 받아 놓았을지언정 기자도 예외가 아니다. 어제 만난 배우 하정우는 낮 12시 반으로 예정된 무대인사에 왜 늦었냐 했더니 "밤샘 촬영 때문에 나한테는 지금이 새벽 시간"이라고 했다 하물며 멀리 영화제까지 와서 아침 8시면 내겐 초초새벽인 셈이다. 그러데도 실패했다. 이명세의 <엠> 티켓, 매표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동나고 없다. 이런 된장! 하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겠군.

아쉬운 마음 달래며 <4개월 3주...그리고 2일>을 골랐다. 다행히 이건 있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루마니아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의 문제작 정도의 정보만으로 일단 간택. 요즘은 칸영화제 최고 영예를 안았다 해도 국내에서 만나보기 힘들다. 영화제 수상이 흥행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게 언제부터인가. 악영향이라도 안미치면 다행이지. 그러니 영화제에서 일단 챙겨 봐야 뒷탈이 없다. 그런데 이 영화,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동안 꼼짝 없이 내 시선을 붙들어 놓았다. 대단한 걸작이다! 꿩대신 닭이라고, <엠> 티켓을 못 구한 대신 골랐는데 대박을 냈으니 내심 쾌재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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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루마니아가 배경이다. 그렇다면 악명 높았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치하라는 얘기.  일찌기 차우세스쿠는 인구 증가를 명분으로 낙태를 금지했다. 이 영화는 당시 루마니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이 의도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가비타라는 여대생과 그의 기숙사 룸메이트 오틸라가 불법 낙태 수술을 감행하는 하루를 조용히 따라간다(영화의 제목은 가비타의 임신 기간이며 낙태된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살았던 세월이다).

겉 보기에 영화는 마치 피임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무슨 성교육용 캠페인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금 더 들어가면 낙태라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관객들의 고민을 종용하는 영화로 읽힐 수도 있겠다. 불법 시술을 위해 호텔에 함께 묵게 된 두 친구는 남자 시술자가 돈 대신 몸을 요구하는 황당한 상황에 직면한다. 낙태를 위해 마지 못해 차례로 몸을 허락한 두 사람. 억압이 또 다른 일탈을 부르는 현장을 목격하며 우리는 이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요구 받는다.

그러나 정작 <4개월...>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다른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전체주의 사회의 암울한 위선, 통제가 야기하는 착취와 비인간화의 실상이다. 방금 시술에 들어간 가비타를 뒤로 한채 그를 돕는 오틸라는 남친의 집에 가야 한다. 남친 어머니의 생일 잔치에 억지로 불려간 그녀는, 지금 그녀를 둘러싼 비극에 아랑곳없이 기성 세대들이 속 좋게 내뱉는 편견의 개소리를 꾸역꾸역 듣고 앉아 있어야 한다. 다시 친구가 있는 호텔로 향하며 오틸라는 구토한다. 지랄 맞은 세상에 늬들은 참 속 편하다고 저주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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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문주의 차가우면서도 옹골찬 롱테이크는 관객들의 사유가 유영할 공간을 넉넉하게 허용한다. 그 안에서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가 펼쳐진다. 현실이 스릴러였으므로, 이 영화는 그냥 스릴러가 된다. 입을 헤 벌리고 빠져 들던 나는, 낙태를 마친 뒤 조용히 마주 앉은 두 여자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순간 섬뜩해졌다. 통제와 억압이 일상이 된 사회는 때로 인간을 저렇게 잔인하게 만든다. 누구든 상처 입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를 봉합하려는 욕망을 갖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도덕조차 손쉽게 생존의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게 아니던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그 장면의 충격은, 대선을 앞두고 도덕이나 양심이 밥 먹여 주냐고 외치고 있는 한국사회의 살풍경과 묘하게 중첩되면서 쉽게 가라 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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