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문화 후진국인 이유

별별 이야기 2013. 5. 29. 10:38 Posted by cinemAgora

오래 전에 <와니와 준하>에 나온 김희선 인터뷰를 제가 속한 FILM2.0에서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영상으로도 인터뷰를 촬영했는데, 얼마 안 있어 공중파 연예 프로그램 작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들이 김희선 인터뷰를 못했으니, 인터뷰 영상을 좀 달라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상을 주면 당신들은 우리에게 뭘 줄 수 있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화면 제공 FILM2.0" 자막을 2초간 넣어주겠다고 그러더군요. "장난 하냐?"고 그러고 끊었습니다. 

2006년에는 회사에서 SPORTS2.0이라는 잡지를 만들면서 창간호 특집을 만들어오라길래, 제가 어렵사리 섭외를 해서 영국으로 박지성, 이영표 선수를 인터뷰하러 간 적이 있어요, 그 때 영국에 회사에는 출장간다고 말하고, 실은 휴가를 온 KBS 기자가 있었어요. 이 양반이 우리가 박지성, 이영표를 인터뷰한다는 걸 알고, 어떻게든 숟가락 하나 얹어 회사에 일한 생색을 내려고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 붙더군요. 졸지에 KBS 기자 따돌리기 특급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따돌리는데 성공했는데, 귀국하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영상을 달라 하더군요. 똑같은 말이었습니다. "영상을 주면 화면 제공 자막 넣어줄게요." 

한국의 큰 방송국들은 아주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지들이 화면 제공 자막 넣어주면 뭐 대단한 홍보라도 해주는 거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건 방송 뿐만이 아닙니다. 이른바 플랫폼 비즈니스를 하는 업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전에는 KT에서 자기네 IPTV에 저와 친구들이 운영하는 팀블로그의 글들을 좀 갖다 쓰면 안되겠냐고, 그러면 당신들을 알릴 수도 있고 좋지 않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어요. 물론, 보상은 없구요. 방송국, 거대 플랫폼 사업자들, 모두 남의 콘텐츠를 날로 먹는 데 익숙해져 있죠. 완전 날도둑놈들인데, 문제는 종사자들조차 그런 생각에서 못벗어나 있다는 거예요. 

이런 사정은 영화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나리오 작가가 각본을 쓰면 그 저작권을 모두 배급사가 가져가 버려요. 그래서 나중에 추가 수입이 나와도 작가는 한 푼도 못 법니다. 그러니 만날 일본 소설을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고, 독창적인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눈을 씻고 찾아도 안나오죠. 

이러면서 어딜가나 "콘텐츠, 콘텐츠" 하고 앉아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 아주 웃음도 안나와요. 대한민국 콘텐츠 시장은 방송국과 플랫폼 사업자들, 대기업 계열의 투자 배급사들이 다 말아 먹고 있습니다. 그들이 콘텐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니 재능이 발굴되고 성장할 토양이 만들어질 리 만무하죠. 씨앗은 다 말라 죽이고,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꼬락서니죠. 

인터넷 강국이면 뭐합니까,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하나 못만들어내는 나라인데. 모바일 강국이면 뭐해요. 거기 실릴 파워풀한 앱들은 죄다 미국애들이 만드는데. 한국의 애니메이터들은 실력이 출중한 걸로 정평이 나 있는데, 애니메이션 투자가 안되니 모두 일본이나 중국 쪽으로 나가고 있고, 국내에 있는 애니메이터들은 거의 다 하청으로 먹고 삽니다. 그나마 뛰어난 애니메이터들은 모두 픽사나 드림웍스 같은 미국 기업에서 일하죠. 나라에서도 애니메이션이나 다큐멘터리 투자를 의무화한 민관 합작 펀드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투자사들이 아예 투자를 안해요. 수익률이 안나오니 그냥 벌금을 내고 마는 게 더 낫다는 거예요. 

문화란, 다른 어떤 분야보다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분야입니다. 10년, 20년을 바라보고 투자를 해야 하지요. 그런데 한국은 단기적 수익에만 골몰하고, 남의 콘텐츠는 날로 먹는 데 익숙해져 있으니, 문화적 발전을 만들어낼 기본 인프라가 안돼 있어요. 즉, 시장 만능주의, 수익 만능주의에 빠져 있죠. 

정책 분야의 수준은 더 가관입니다. 콘텐츠진흥원과 무역보험공사가 심형래의 <라스트 갓파더> 지원했던 거 아시죠? 아다시피 영화 쫄딱 망했습니다. 그런 형편 없는 쓰레기에 나랏돈을 지원하면서 문화 진흥이라고 생색을 내는 게 우리나라 문화 정책의 수준입니다. 

그러다 싸이 같은 돌발적인 스타가 등장하면, 한류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대한민국 문화 수준이 아주 높아진 것처럼 자랑질을 해대죠. 언론은 거기에다 부채질을 해주고요. 싸이가 뜨면 뭐합니까. 대한민국 가요 시장은 아이돌 일색이고, 나가수나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그램은 옛날 노래만 제껴 부르고 있는데요. 한마디로 가수는 넘쳐 나는데 노래는 없는 것이죠.

한국영화는, 그 질적 수준과 상관 없이 미국영화에 비해 점유율이 올라가면 무조건 좋다는 패러다임에서 정부도 언론도 벗어나질 못해요. 까놓고 얘기해서 한국영화 점유율이 높아진다고 스탭들 처우가 개선된 것도 아니에요. 관객들은 점점 더 낯선 영화에 인색해지고 있고, 한국영화계에도 지난 몇년간 놀랄만한 수작이 가물에 콩나듯 나올 뿐입니다. 

불과 12년 전에는 라스 폰 트리에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둠 속의 댄서>가 우리나라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런 영화가 개봉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필시 멀티플렉스 골방에서 교차 상영 대우를 받고 있을 겁니다. 그만큼 한국의 문화적 수준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다시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결국 기업과 정책 사이드에 사실상 문화 마인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기인합니다. 날로 먹기에 익숙한 기업들, 문화를 외형과 실적으로만 계산하는 정책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문화 후진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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