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베리드'의 폴 콘로이에게 부침

cinemAgora 2010. 11. 21. 15:24

<베리드, Buried>, 스페인, 95분, 15세 관람가, 감독 로드리고 코르테스, 주연 라이언 레이놀즈


폴, 열흘전 나는 당신을 만났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원래는 당신은 그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돼있지만, 어쨌든 당신이 땅 속의 그 좁은 관 안에서 살아 남기 위해 버둥대는 - 미안해요, 이런 표현을 써서. 하지만 지금은 딱히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군요- 그 시간 동안 나는 당신을 1시간 반동안 지켜봤죠.

그 뒤로 나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꽤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혀야 했어요. 그 잔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건 뭐랄까, 죄책감 같은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 안전한 세상에 편안하게 앉아 스크린에 재연되는 당신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켜보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랄까,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이에요. 내가 복잡한 심경이라고 말했던 것은, 그 죄책감 비스무리한 느낌에 어떤 종류의 기묘한 쾌감이 따라 붙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느낌 알겠어요? 아아, 당신에게 내 느낌 따위를 얘기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 당신은 여전히 그 어둡고 숨막히는 관 속에서 매초를 다투고 있을테니까. 어쨌든 그 기묘한 쾌감의 정체는, 한마디로 내가 당신이 갇혀 있는 상황을 너무나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어느 순간, 나는 당신이 되었죠. 폐소공포증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긴 하지만, 이 체험만큼은 신비롭게도 지나치게 흥미진진한 폐소공포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거기 당신을 가둔 그자들만큼이나 잔인하고도 집요하게도, 카메라는 단 한번도 당신과 나의 시야를 관 바깥의 세상으로 안내하지 않았죠. 어쩌면 그럴 수 있어요? 단 한번도, 정말 단 한번도. 오로지 관안에서의 시작과 끝! 사실 그게 그 안에 갇힌 당신의 절박함을 한치라로 짐작하게 만드려는 연출자의 의도라는 걸 모르지 않아요.

하지만 너무 잔인했죠. 어떻게 단 한순간도, 땅 위의 그 청량한 공기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인지. 핸드폰. 지상과의 교감이 허락된, 그러나 몸값을 요구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이 거기 놓아두었던 그 문명의 이기가 당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희망이었죠. 그리고 부족한 산소만 잡아 먹는 빌어먹을 지포 라이터.

폴 콘로이. 당신은 그 95분간의 사투를 통해 관 속에 갇힌 건 당신 뿐만이 아니라는 걸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어요. 자기 국민의 안전을 말로만 걱정하는 국가와 외교의 이면, 자본의 탐욕에 의해 개 취급 당하는 노동자, 그리고 촘촘한 네트워크 세상에서 더 악화되고 있는 소통의 살풍경이, 거기 한꺼번에 생매장돼 있었죠. 어쩌면 그것들은 당신이 갇히기 훨씬 이전부터 거기에 묻혀 있었을지도 몰라요. 당신이 그것을 확인시켜준 셈이죠.

버나드 허먼의 스코어를 연상시키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히치콕의 짙은 그림자를 봤어요. 그리고 기가 막힌 방식으로 우리에게 절묘한 이야기를 선사하는 21세기 버전의 히치콕을 목격했죠. 서스펜스의 진수. 그러나 그것이 단지 이야기 뿐이었다면, 영화적 쾌감에 그친 것이었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진 못했을 것이에요.

6피트 아래 땅속, 그 한평도 안되는 작은 공간에서 당신이 벌인 그 사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단면을 다른 어떤 웅변보다 더 현실적이고도 생생하게, 그리고 힘있는 스펙터클로 펼쳐 보여주더군요. 그리하여, 나는 단 한번도 관 바깥의 세상을 보여주지 않고도 세상의 부조리를 꿰뚫어 거기 모두 모아 놓은, 당신의 창조자이자 또 다른 당신인 감독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품게 됐어요.
 
폴, 이 시각에도 촌각을 다투며 목숨을, 삶을, 아내와 아이들과의 단란하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그렇게 큰 욕심 없는 평범한 인생을 갈망하고 있을 당신 앞에 이런 편지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일까요.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관 안에 갇힌 당신이자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응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폴, 우리 모두를 대표해 그 안에 갇혀 있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부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트위터: @cinemagora

*<베리드>는 12월 2일 개봉합니다. 연말이고 하니 상영관수가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찾는 관객이 많으면 늘어날 겁니다. 그렇게 작게 시작해서 관객과의 접점이 넓어지는 흥행 사례가 최근 들어 참 드물었습니다. 관객들의 열정에 의해 <베리드>가 그 드문 사례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베리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