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영화 이야기 2017. 7. 31. 18:00 Posted by cinemAgora

영화 <군함도>는 송중기의 영웅 활극과 황정민의 가족 휴머니즘과 소지섭의 로맨스를 일제강점기라는 양은 도시락통에 넣고 마구 흔들어 비볐다. 마구 비볐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비벼지지가 않았다. 이 영화의 감독은 류승완이 아니라 돈이다. 알파고가 연출을 했어도 이보다 더 잘 만들었을 것이다.


영화 <군함도> 흥행의 경마 중계식 보도가 지난 며칠 동안 전개된 양상은 아래와 같다.

역대 최단 기간 2백만 돌파--> 
역대 최단 기간 300만 돌파 '타이' 기록 --> 
'올해' 최단 기간 400만 돌파.


2천 개가 넘는, 역대 최다 스크린 확보 신기록을 세워 놓고 흥행의 신기록 행진은 주춤한 것이다. 영화판에서는 흥행세가 주춤하는 걸 ‘드롭(drop)’이라고 부른다. <군함도>가 예상보다 빠른 드롭세로 접어들었다고 분석하는 건, 아전인수가 아니다. 앞서 천만을 넘었던 <부산행>이나 <암살> 등의 네티즌 평점이 각각 8점대와 9점대였던 데 비해 <군함도>는 7점대에 머물고 있다. ‘역사 왜곡‘ 논란을 떠나 영화의 완성도가 관객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영화에 대한 일본 언론의 폄훼는 감독 류승완이 따로 낸 보도자료에서 지적한 바대로 “일본이 아직도 그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와 청산되지 않은 어두운 역사를 마주할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에 대한 영화적 재연 방식에서 그럴만한 빌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일본은 물론 절대악으로 다뤄지지만, 영화의 기둥 플롯과 갈등 구조는 ’조선인 대 조선인‘이다.


류승완은 “친일파에 대해 계속 지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친일파는 징용된 조선 민중 속에도 있다. 심지어 주인공도 사실상의 친일파다. “살기 위해 협조했다“는 건 친일파의 대표적인 방어 논리다. 관객들은 그것이 불편한 것이다. ”역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창작물“인 이 영화는 류승완의 주장대로 역사적 고증이 철저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시대와 교호하는 ‘역사 의식'의 부재를 고백한다.


이 영화를 통해 그 시대, 징용되었던 이들의 고통에 한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건 내가 너무 관념적이어서일까? 아니다. 이 영화의 관심사는 친일파이고 나발이고가 아니라 처음부터 송중기의 벗은 상반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로지 우리의 잘생긴 송중기만은 훈도시 입은 식민지 조선 민중의 굴욕적인 하체를 보여주는 데 예외가 된다.


나는 이 영화가 천 만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훈장을 받을 가치가 있는 영화가 아니다. 만약 이 작품이 천 만을 넘긴다면, 그건 영화의 힘이 아닌 순전히 배급의 힘 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의 감독이 류승완이 아니라 ‘돈’이라고 말한 건 그런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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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인문적 접근

영화 이야기 2017. 7. 31. 17:59 Posted by cinemAgora

영화에 대한 인문적 접근

모든 예술은 상징 체계이다. 특히 영화는 기술 혁명에 의해 발명된 시청각적 상징이다.

상징은 예술가라는 필터를 통해 창안된다. 따라서 예술가가 무엇을 어떻게 상징하는가를 읽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오늘날, 숱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굳이 상징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가상 체험의 롤러코스터. 즉, 자극을 동원한 쾌감을 제공하는 데 집중한다. 태반의 관객은 굳이 해석의 수고를 겪지 않아도 쾌감, 오로지 그 쾌감에 반응하는 것을 원한다. 영화 산업이 관객들을 그렇게 길들여 왔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에 문제 의식을 품은 영화 예술가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오감과 예민한 인식의 촉수로 끌어 안은 현실을 목도한다. 그리고 거기서 상징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끌어낸다. 따라서 영화라는 상징은, 창작자가 가진 현실 인식의 반영이다.

여기서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인간)인 관객에게 숙제가 주어진다. 도대체 창작자는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가. 그가 가진 삶과 세계, 인간에 대한 태도는 얼마나 타당한가. 이것을 따지는 게 비평 행위다. 그리고 모든 관객은 비평가다. 분명히 말하지만 상품 사용 후기와도 같은 별점 매기기는 비평이 아니다.

현실--->창작자--->상징

이 공식을 인지한다면, 관객은 상징성에 내포된 현실을 추론할 수 있어야 한다. 상징화된 현실은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고, 그 의미(significance)를 찾아내는 것이 해석이다.

물론 귀찮은 작업일 수 있다. 영화 한편 보고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고 일축하는 분들은, 그냥 쭉 그렇게 생각하고 보시면 된다. 그러나 한 가지, 그런 관성에 익숙해 있는 한, 일년에 백 편의 영화를 본들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비자본주의의 영화 상품은 구매자로서의 당신의 선택과 감상이 '항상 참'이라고 말한다. 거짓말이다. 예술적 체험에 있어서 항상 참은 없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는 순간, 상징의 미학적 완성도와 더불어 타당성까지 탐색할 준비가 된 것이다.

항상 참은 존재하지 않지만 끊임 없이 참을 향해 나아가는 것, 별점이 아닌 정제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 그게 영화 매체에 대한 인문적 접근의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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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

영화 이야기 2017. 7. 31. 17:58 Posted by cinemAgora

"리와인드 리와인드! 바로 거기! 재생! 바로 저 이미지. 저 순수한 소녀를 저렇게 함부로 다루는 저 이미지. 내가 디자인한 유니폼을 입은 새끼들이! 바로 저 이미지 떄문에, 우리는 좆된 거야."

잊기 전에 기록해 둔다. <옥자> 중에 틸타 스윈턴 대사.

<옥자>는 이미지의 향연이다. 틸타 스윈턴과 제이크 질렌할과 폴 다노를 캐스팅하고, 뉴욕을 배경으로 소동극을 연출한 이미지. 준중심부 감독이 언감생심 미국 자본의 세례를 받아 만들어낸 다국적의, 그러나 울림 없는 이미지. 그 이미지에 대한 종속 때문에 이 영화는 좆됐다. 신화적 구성에서 한치도 오차 없이, 600억 원에 힘입어 설계된 "있어 보이는 이미지." 게다가 오 마이 갓! 구출의 승부수가 구매라니!

나는 이 영화에 대한 리뷰의 제목을 구상했다. 
"600억 짜리 동화 또는 해프닝"

참고로, 나는 삼겹살을 먹는 나에게 추호도 자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삼겹살을 먹기 위해 돼지는, 수퍼 돼지든 말든 죽어야 할 운명이다. 그리고 인간은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으면 죽게 돼 있다.

나의 일차적 질문은 이것이다. 왜, 하필, 그 숱한 수퍼 돼지 중에 옥자만큼은 살아야 하는가. 이유는 단 하나다. 옥자는 우리의 주인공 미자의 반려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변희봉 할아버지의 닭백숙은 당연한 죽음인가?

만약 이런 유의 영화를 통해 환경주의에 대한 대단한 은유를 꿈꿨다면, 봉준호는 어리석은 감독이다. 그런 건 마야자키 하야오가 이미 훨씬 더 훌륭하게 완수했다. 이 영화에서 작가적 야심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는 전형성으로 대중을 사로찹고 싶은 넷플릭스에 의례적 감사를 표할 뿐이다.

봉준호는 그 자신 오이만 먹는 채식주의자인지 묻고 싶다. 또 하나, 온라인으로 영화를 즐기지 않는 나는 넷플릭스 무료 기간 끝나면 해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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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영화 이야기 2017. 7. 31. 17:57 Posted by cinemAgora

일제 강점기가 한국 근현대사에 남긴 상흔은 여전히 깊다. 또한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식민지 상황을, 식민지를 통과한 조선 민중의 아픔을 상상하는 것은, 그래서 절실하고도 필요한 작업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틀어진 초상이 대부분 그 역사적/비극적 시공간을 발원지로 삼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영화는 일제 강점기를 어떻게 상상해 왔는가. 불행하게도 <암살>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소환했던 식민지 상황은 표피적인 추상성과 두루둥술한 피해 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최동훈의 <암살>(2015)은 가상적인 활극으로나마 영화를 역사적 피해 의식으로부터 탈출시켰다. 친일파 청산이라는 미완의 숙제를 무의식적으로 껴안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자, 이제 그 시대를 다시 바라보자”라고 발상의 전환을 제안했던 것이다. “알려줘야지.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안옥윤(전지현 분)의 슬프고도 당찬 대사는 그 역설적 자신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염석진(이정재 분)은 해방 직후 설립된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앞에서 낯 두껍게 발언함으로써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의 정체를 자백한다. “해방될 줄 알았나?”

자, 이제 한국영화는, 한국의 생각 있는 영화쟁이들은 바야흐로 그 시대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숙하게 들어갈 차례였다. 허구적으로 상상되는 식민지의 가상 인물과 가상 현실이 아니라, 구체성을 확보한 가운데 식민지적 시공간의 정체를 더욱 입체적으로 껴안고 추체험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자임한 이는, 뜻밖에도 숱한 상업영화들을 만들어 왔던 이준익 감독이었다.

이준익은 영화 <사도>를 통해 실존 인물이자 역사적 개인을 소환해, 시대성에 구속된 이들의 비극을 재연하는 데 성공했다. 이 탁월한 시대극을 마치자마자, 이준익은 곧바로 5억 원의 저예산으로 <동주>를 연출했다. 역시 실존 인물 윤동주 시인을 재조명한 것이다. 우리가 단지 ‘시어’로만 상상한 식민지 청년의 슬프고도 무기력한 감수성은, 의도적으로 흑백 화면을 채택한 이준익의 영상 미학을 통해 웅장하고도 숭고하게 재해석된다.

내가 ‘웅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비극이 비극으로서의 목표를 달성했을 때 전달되는 미학적 경지를 <동주>가 성취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비극의 진경은 다분히 윤동주라는 정의롭되 문약한 인물과, 그의 사촌이자 피가 끓는 행동파 청년 송몽규의 다른 방향성이 같은 비극적 최후를 향해 있기에 증폭된다.

그렇다. 시대에 구속된다는 것은 그렇게 슬픈 것이다. <동주>는 그럼으로써 단순한 평전의 차원을 넘어 보편 언어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어쩔 도리 없이 시대에 갇혀 있어야 하는 우리의 삶이, 비극 그 자체임을 증명한다.

영화 <박열>을 말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과감하게 식민지 청년의 심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간 이준익은, <동주>의 성공에 힘입어 역시 실존 인물을 담은 <박열>을 통해 또 한번 비극의 진경에 다가서려는 욕망을 서슴없이 실천에 옮긴다.

영화의 줄거리를 구구절절 읊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단지 이렇게 얘기하자. 영화 <박열>은 두 명의 역사적 개인을 두 개의 축으로 재해석한다. 저항과 사랑.

1920년대의 일본 도쿄에서 살아가는 무정부주의자 박열(이제훈 분), 역시 무정부주의자로서 일본의 천황제를 경멸했던,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 <동주>의 윤동주와 송몽규가 전한 정서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무기력한 분노’였다면, <박열>의 두 인물이 전하는 정서는 일본제국주의라는 역사적 추물과 영화적 안타고니스트에 대한 ‘조롱’과 ‘경멸’이다. 두 인물이 제국주의 통치 국가인 일본 출신 여성과, ‘구타’라는 소박한 방식 또한 저항의 도구로 삼았던 식민지 조선 출신 청년이라는 국적 구별은, 이 영화에서 효력을 상실한다.

두 사람은 관동 대지진의 여파로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을 가리기 위해 기소된 ‘기회’를 틈타, 제국주의의 본질인 일본의 천황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또 다른 측면에서의 웅장한 ‘기개’를 드러낸다. ‘불령사’라는 조직원이었던 두 사람이 구속된 이후 일본 판사 앞에서 심문을 받는 장면과, 재판을 받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따로 심문을 받는 두 사람이 교차되는 대목에서, 이준익은 슬쩍 두 사람의 로맨스를 뒤섞는다. 단 한 번의 키스신도, 단 한 번의 정사신도 등장하지 않지만, 이들의 동지애와 사랑은 숭고한 동시에 더없이 에로틱하다.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다른 설정도 아니고, 판사의 심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그 절절한 사랑이 자동 웅변되고 있으니 말이다.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저항 정신과 굴하지 않는 사랑. 이것이 <박열>이 추구하는 두 개의 정서적 축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결합을 정교한 내러티브와 솜씨 좋은 편집, 폭발력 있는 연기의 화학 작용으로 상상해 낸다. 그 상상은 힘이 넘친다. 너무 슬퍼서 힘이 넘치고, 너무 여운이 길어 힘이 넘친다. 구체의 힘은, 구체적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를 성찰하는 진정성은 이토록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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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군

영화 이야기 2017. 7. 31. 17:56 Posted by cinemAgora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는 유명한 속담이다. 영화 <대립군>을 보며 든 생각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은 훌륭하다. 나라가 나라일 수 있는 것은, 이름 없이 희생을 자처한 무수히 많은 ‘익명’의 백성이 존재했기 때문임을 웅변한다. 누군가의 군역을 대신해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 영화 속 조선의 백성들이, 임진왜란의 난리통에서도 싸움터를 버리지 못했던 그들이 영화를 통해 소환된다. 하여, 영화는 그들, 또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인다. “국가는 국민입니다“라는 영화 <변호인>의 외침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캐스팅도 괜찮다. 이정재와 여진구는 각자에게 주어진 캐릭터를 비교적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이 영화는 사실상 백성의 익명성을 상징하는 대립군 ‘토우’(그의 이름은 영화 내내 한 번도 불려지지 않는다.)와 의주로 도망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의병을 모으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세자 광해군의 처지를 슬쩍 등치시킨다. 광해 역시 어쩌면 무능한 선조의 대립군이었음은 마찬가지라는 논리는, 비록 토우가 국가로부터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는 봉건 사회의 ‘핍박받는 개인’ 그 자체일지라도, 비록 세자가 봉건적 신분질서의 꼭대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두 인물을 점차 같은 입장에 서게 만드는 이야기는 영화의 극적 구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여지가 충분하다.

■스포일러 주의

그러나 문제는 디테일이다. 그저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립질’에 나선 이정재는, 왜 세자의 입장에 그렇게 쉽게 동화되는가. 여기에 의문 부호가 생긴다. 왜냐하면 대립군에게 국가란 자신의 처지와 전혀 무관한 것이며, 영화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그들이 설령 나중에 청나라가 될 오랑캐의 편에 선들, 시대의 맥락 안에서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건적 신분 질서에 종속되기로 마음 먹은 이정재의 선택은, 그의 처지와 정면으로 대립(對立)한다. 때문에 이 심적 변화에는 주인공을 불가피하게 압박하는 거대한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쉽게도, 감독 정윤철은 그걸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극적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은 여진구가 연기한 광해인데, 어쩔 수 없이 분조를 떠맡은 유약하기만 한 인물에서 쳐들어오는 왜군들을 향해 스스로 활 시위를 당기는 과정의 변화는 설득력이 있다.

여전히 거슬리는 디테일들. 이솜이 연기한 나인은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광해의 곁을 꿋꿋이 지키는 걸까. 그 부자연스러운 커플링은, 결국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슬로 모션으로 처리된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위한 작위임을 눈치 챌 수밖에 없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게 아니라 결과를 위해 원인을 소비적으로 배치하는 시나리오는 그리 훌륭하다고 평할 수 없다. 내관은 왜 광해를 배신한 것일까. 그리고 왜 그는 죽는 순간에 광해의 정치적 비하인드 스토리를 주절주절 읊는 것일까. 어이 없게도, 우리는 피를 토하는 내관의 입을 통해 조선 왕조사 수업을 듣는다. 중간 중간 광해 일행을 공격하는 마스크 쓴 인간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실타래가 미처 풀리지 않은 채 <대립군>은 (힘들여 찍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다소 엉성한) 공성전 한 번 배치하고 익숙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어떤 시대극이든, 역사적 사건과 인물은 현재의 열망 또는 결핍에 의해 불려 나온다. <대립군>의 시사점은, 지금 이 시대의 무엇과 조우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정치적으로만 올바르되 지루한 이 영화는, 딱히 지금의 정치 사회적 국면을 살아가는 대중의 무의식과 광범위한 접점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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