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아비정전>

영화 이야기 2007. 6. 5. 13:2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 동안 팀 블로그가 북적거렸다. 최민식과 그가 출연한 사채 광고에 대한 논쟁이 한적하기가 겨울철 바닷가 같던 이 팀 블로그를 화개장터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오픈 블로그를 표방했으니 얼떨결에 터져버린 대박 흥행(without money)에 기쁘기도 했지만(그 관심이 포지티브던 네거티브던 간에), 서슬이 퍼런 댓글들에 영 글쓸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GNP도 늘었고, 아파트도 많아 졌고, 거리에 나가보면 사람들의 옷과 액세서리의 레떼르들도 셋 건너 하나씩은 명품이건만, 왜 아직도 무슨 논쟁만 붙으면 죽을때까지 싸우려 드는지... 영 모를 일이다.
혼자 글 올리느라고 힘들어 했을 김PD와 댓글 다시느라 귀중한 시간 내주신 방문객들에게 이젠 좀 여유가 필요할 것 같다. 왜 이런 광고 있잖은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 말해놓고 나니 아무 것도 한 것 없는 나도 휴가 생각이 간절하다.

1990년의 어느날, 비디오 숍에 갔다가 별 기대하지 않고 골라온 영화가 한 편 있었다. <아비정전>. <몽콕하문-열혈남아>에 이어 왕가위의 신화가 시작된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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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s of being wild


친모와 양 엄마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비의 슬픈 눈빛, 오랜 갈등 끝에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찾아 갔지만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우울한 독백. 그리고 이어진 대사 '한 번도 뒤 돌아 보지 않았다. 내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그녀에게 나 역시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간지나는 대사빨에 애써 감정을 숨긴 채 거들먹거리며 걷던 장국영의 뒷 모습,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울창한 나무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하긴 그 땐 나 역시 영화 속 아비 만큼이나 예민, 명민(!)하던 시절이니 꽤 오래 잊지 않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건 없으리라. 아무튼 아마도 평생동안 내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그 슬프디 슬픈 장면에서 사용되었던 곡으로 추정된다...(추정이란 애매모한 단어에는 다시 확인해보지 못했다는 자기 반성이 담겨 있다... 양해의 인사 꾸벅!) <Always in my heart>. 노래 제목에서 다시 한 번 슬퍼진다.

왕가위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음악의 선곡이나 특히 영화의 영문제목에서 탁월한 감수성을 발휘하곤 한다. <아비정전-아비 이야기>의 영문제목은 <Days of being wild>이다. '야성의 나날' 쯤 되어보이는 영문제목을 보다보면, 제임스 딘 주연으로 헐리웃에서 만들어졌어도 꽤 괜찮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엉뚱한 상상만 한다).

'97년 홍콩 반환 문제를 친모인 중국과 양엄마인 홍콩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풀어낸 <아비정전>은 원래 2부작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전작 <몽콕하문-열혈남아>를 본 제작자들이 백지수표를 위임했다나 어쨌다나... 하지만 <아비정전>은 엄청난 흥행 실패를 기록하고, 대차대조표의 격차에 경끼 일으키신 제작자 행님들은 재빨리 '취소취소'를 외치시며 <아비정전> 2부의 기획을 백지화하기에 이른다(백지수표에서 백지화라... 이 오묘한 말장난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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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다, 장국영

물론 한참 후에 거장 칭호 받으며 힘쎄진 왕가위가 <동사서독>이라는 제목으로 <아비정전> 2부의 이야기를 완성했지만, 당시만 해도 심히 상처 받은 불쌍한 배우 한 명 있었다. 바로 양조위 되시겠다. <아비정전>의 그 유명한 장면, 사각 빤쮸바람으로 멋들어지게 맘보 춰주시고 단숨에 청춘 스타로 등극한 장국영을 보며, '<아비정전 2>에선 바로 내 차례다'를 외치셨을 그(<아비정전 2>는 양조위가 주연 예정이었다).

하지만, 2편을 암시하는 영화의 마지막 2분여에 잠깐 출연한 후, 제작이 중단 됨으로 잠시 공황 상태에 빠지셨으리라. 그래도 <아비정전>의 마지막 2분은 진정 걸작이다. 따로 떼어내 뮤직 비디오로 감상해도 모자람이 없는 롱테이크가 아닐 수 없다(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인거... --;;).

천장이 낮은 어느 방, 남루한 생활에도 양복 선과 헤어 스타일에 신경써주시는 양조위씨. 담배를 피워물고 약간 꾸부정한 자세에서도 폼 잃지 않아 주시며, 몇 푼의 현금과 트럼프 카드를 주머니에 집어 넣은 채, 절전을 위해 불끄시며 외출해주시는 그의 모습이란... 20대 초반, 팍팍한 현실에서도 항상 멋진 삶을 꿈꿨던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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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난다, 양조위

장국영은 거짓말처럼 만우절에 생을 마쳤다. 그리고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팬이 되어버렸다. 양조위는 <상성/상처받은 도시>를 통해 여전한 미모를 뽐내고 있다(도대체 이 인간의 하루 삼시 세끼 식단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우린... <아비정전>을 손에 든 채 집으로 향하던 그 때가 그립다...

P.S.
1. <아비정전>의 전설적인 그 마지막 장면에서 양조위의 아우라를 완성시켜준 곡 <Jungle drums> 올린다. 찾느라고 힘들었다. 쌓아 놓았던 CD 절반은 무너트리며 찾아냈다. 박수 한 번 주시라~!
2. 양조위는 <아비정전>의 마지막 2분 장면을 수십번도 넘게 찍었다고 한다. 왕가위가 특유의 변태성향(!)을 드러낸 것이다. 더구나 한 방에 가는 롱테이크 장면이었으니... 결국 양조위가 울었다나 어쨌다나... 얼레리 꼴레리...
3. 뭔가 할 말이 있었는데... 글쓰다 잊어버렸다... 쩝...

* 첨부되었던 음원은 삭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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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전도연 효과가 약발이 있었다.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소식에 힘입어 <밀양>이 개봉 2주차에 뒷심을 발휘했다. 스크린수도 개봉 첫 주말보다 60여개 늘어났고, 주말 관객수도 오히려 첫 주말보다 늘었다. 그렇게 해서 얼추 100만 명을 눈앞에 뒀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이래저래 관습적인 상업영화와는 다른 길을 걸어 왔지만, 묘하게도 흥행 참패한 적이 별로 없다. <밀양>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밀양>은 올해 부쩍 어려운 상황에서 개봉했지만, 기가 막히게도 전도연이 천군만마가 됐다.

하지만 해적 잭 스패로우를 거꾸러뜨릴 정도는 못됐다.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가 부동의 1위다. 개봉 2주차만에 400만 명을 넘보는 상황이 됐다. 스크린수도 840개로 여전히 위력적인 배급 규모다. 이번 주말 <슈렉 3>로 바통을 넘기겠지만, 아주 넘기진 않을 기세다. 넘기는 척 계속 뛸 게 분명하다. 그것은 <황진이>로 바통을 넘길 <밀양>도 마찬가지다.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와 관련해 할 말은 여기까지다. 그밖의 영화에 대한 언급이 큰 의미가 없을 지경으로, 지금 극장가는 영화 두 편의 독무대다. 그나마 그 두 편중의 한편이 한국영화, 그것도 이창동 감독의 작가주의적 영화라는 점이 위안이 될 뿐이다.

국내 주말 박스 오피스(2007.06.01~2007.06.03)
순위  영화명 개봉일 스크린수
서울/전국
서울주말 전국누계 관객점유율
1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05.23 189/840 227,500 3,887,600 52.2%
2  밀양 05.23 75/321 114,200 982,800 26.2%
3  상성: 상처받은 도시 05.31 27/103 19,100 57,200 4.4%
4  전설의 고향 05.23 37/200 17,300 373,800 4.0%
5  스파이더맨 3 05.01 46/250 14,400 4,912,600 3.3%
6  못말리는 결혼 05.10 38/223 13,700 1,262,400 3.2%
7  넥스트 05.17 31/120 13,000 469,000 3.0%
8  데스워터 05.31 18/65 11,400 42,700 2.6%
9  팩토리걸 05.31 4/12 4,100 6,500 0.9%
10  마리 앙투아네트 05.17 2/2 900 7,400 0.2%


#이 박스오피스 수치는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기자의 취재를 통해 확인된 스코어임을 밝힙니다.
#도표에 명기되지 않은 다른 영화의 흥행 성적이 궁금하신 분은, 댓글로 문의하시면 아는 한도 내에서 답변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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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짜꿍만이 살 길이다!

별별 이야기 2007. 5. 31. 18:18 Posted by cinemAgora

'PD 더 리퍼' 김경찬 PD께서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선견지명에 입각한 글로 대박을 터뜨린 걸 보고, 이 블로그의 또 다른 주인인 나와 김태훈씨는 각자 전화를 걸어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전설의 살인마 '잭 더 리퍼'를 닮으신 그 날가롭고 까칠한 성품에 처음부터 싱글벙글 짝짜꿍을 예상하진 않았다. 과연 목소리 톤으로 감지된 1차 반응은 시큼털털. "무섭네요. 인터넷이란 게." 방송가에서 몸담으면서도 이렇게 즉자적으로 수치화되는 피드백을 경험해본 적 없으실테니 일견, 당연한 반응이다.

한편으론, 나와 김태훈 씨 역시 뭔가 그에 필적할 만한 대박을 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의무감에 시달렸다는 걸 고백해야 겠다. 심지 깊으신 김태훈 씨는 "알았어, 이제 감 잡았어"하면서 특유의 입담을 내세워 헛물만 켜더니 이후 바쁜 방송 스케쥴을 소화하느라(실은 술 마시느라) 아무런 글도 올리지 않고 있지만, 실천력 빼곤 남는 게 없는 나는 비교적 부지런히 썼다. 애시당초 방문자 수에 연연하지 말자 다짐하고 연 블로그였지만, 견물생심이라고 하루에 10만 명이 들어오는 걸 보고 이 촌놈이 눈이 뒤집힌 것이다. 이래서 졸부들을 욕할 게 못된다.ㅠㅠ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경 14만 명에게 한꺼번에 노출된 블로그이니, 뭐라도 쓰면 알아서들 그 반에 반이라도 들와 보시겠지, 싶었다. '<황진이>가 맥 빠지는 이유'를 쓰면서 내심 그런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거, 또 한번 고백한다.

아뿔싸,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숱한 평민들의 포스트 굽어 보시며 입맛대로 줄 세우시는, 포털의 빅브라더님들을 업수이 여겨도 유분수지. 개봉 앞둔 영화를 퍽퍽 밟아 놓았으니, 그것도 '좋은 생각'스러운 착하고 아름다운 문체가 아니라, 성기고 퍽퍽한 준 욕설로 씹었으니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제목만이라도 무색무취하게 가든가, 인터넷 매체들의 생존비법대로 새끈한 낚시질 제목을 뽑았다면 얘기는 달랐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런 제목에 이런 내용의 글이 이를테면 다음이나 네이버에 마련된 메타 블로그 페이지의 헤드라인으로 뽑혀 나간다면, 그거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일 게다. 영화 광고의 절반 이상이 온라인으로 가고 그 절대 수치가 포털에 간다. 아, 남의 밥줄을 건드릴 수 없는 일 아닌가. 언감생심, 꿈이라도 꿔서 미안하게 됐다.

말이 나와 말인데, 이 판에선 짝짜꿍이 살길이다. 비판? 견제? 개나 줄 말이다. 취재원 등 돌리고 광고 뚝 끊긴다. 아름다운 문체로 영화와 배우의 고명하심을 칭송하라! 그것이 밥 그릇을 챙길 지름길이다. 영화계에 인맥을 다질 필살기다. 좋은 영화 침 튀기며 칭송하고, 후진 영화는 아예 언급 말 것. 보나니, 모든 영화 훌륭하고, 만나나니, 모든 감독과 배우 아름답고 생각도 깊으시다. 짝짜꿍 평론, 짝짜꿍 인터뷰. 근데 그게 잘 안돼니 스스로 통탄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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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전도연, 그후...

별별 이야기 2007. 5. 31. 10:3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며칠 전, 전도연에 관한 나의 글이 인터넷에서 '화제'(인터넷 매체 기자의 표현)가 됐단다. 덕분에, 오픈 한 지, 겨우 열흘을 넘긴 이 블로그는 그날 하루에만 방문자 10만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런, 세상에...

그러나, 나는 별로 기쁘지 않다. 아니, 당혹스럽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치, 교실에서 친구에게 수줍게 내민 일기장을 누군가 낚아 채, 큰 목소리로 줄줄 읽어 버렸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랄까.  

나 자신이 언론인이며, 지난 12년간 방송은 물론, 온갖 신문과 잡지를 통해, 말을 하고, 글을 써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험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내 글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인터넷 문화가 점점 더 무서워지더라.

'뉴스엔' 이라는 인터넷 매체는 '전도연 데뷔초 종합병원 출연 당시 신입PD 회고록 화제' 라는 기사를 포털사이트에 올리고, 누군가는 나의 글을 마치 자신의 글 인양 포장해, '낚시질'을 하시더라. 사실, 이 블로그는 오픈 블로그를 표방했으니, 이곳에 올려진 글은 당사자들의 허락없이 마음대로 퍼가도 괜찮다. 출처 표기만 해준다면야...

그러나, '뉴스엔'의 기사 만큼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뉴스엔' 기자는 글을 쓴 내게 그 어떤 확인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 언론인으로서, 나는 취재의 제1원칙이 '사실 확인'이라고 배웠다. 물론, 그 글은 내가 쓴 글이 맞고, 내용 역시,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임이 분명하니, 겉으로 보기에 '뉴스엔'의 기사는 '사실'에 근거한 기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만약, 그 글이 나를 사칭한 누군가에 의해 쓰여졌다면? 내용 역시, 특정한 목적을 위해 가공된 글이라면? 역사에 '만약'을 붙이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해도, '사실 확인'이라는 언론인의 기본 소양을 무시한 인터넷 매체의 '글'쓰기(기사의 기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니, 기사가 아니라 그냥 '글'이다)'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들의 취재 원칙은 '사실 확인'이 아니라, '속보성과 화제성'인 모양이다.

모 광고의 카피처럼, 인터넷은 필연적으로 '스피드'가 생명인 공간이다. 나 역시, 이 점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기본'을 망각한 '속도'는 필연적으로 '사고'를 부른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인터넷 문화는 바로 그 '속도' 때문에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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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가 맥 빠지는 이유

영화 이야기 2007. 5. 29. 14:16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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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현 감독의 신작이자 송혜교의 변신이 주목된다던 <황진이>를 일반 시사를 통해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그다지 즐기지 못했다. 아닌 영화와 괜찮은 영화로 굳이 나눈다면, 요즘 한국영화에 대한 언론 일반의 응원과 호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머금고 이 영화는 아닌 쪽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강우석 감독이 기획한 시네마서비스 배급 영화들이 왜 자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정면 대결을 펼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아들> vs <스파이더맨 3>, <밀양> vs <캐리비안의 해적 3>, <황진이> vs <슈렉 3>- 용감해 보이는 게 아니라 무모해 보인다.)

우선, 장 감독은 왜 굳이 북한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확고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황진이와 관련한 역사 기록이 알려주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벽계수, 서경덕과 관련한 일화 등) 외에 노비 '놈이'와의 관계를 설정한 북한 소설의 의도는 비교적 자명하다. 기생과 노비라는 똑같이 천한 신분을 공유하는 두 명의 소외된 천재가 계급적 연대와 에로스라는 두 끈으로 묶인다. 신분제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봉건질서에 대한 인민의 저항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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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화는, 황진이의 기예와 기백에 초점을 맞춘 하지원의 TV 드라마 <황진이>에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소설로부터 받아 안은 시대성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해야 하는 부담을 안는다. 그 부담을 수행하는 방식이 '블랙의 반란'으로 묘사되는 황진이의 한복 패션쇼와 미술에 치중하는 것일까? 여러 평가들을 살펴보니, 대충 미술과 의상은 화려하다는 쪽에 쏠려 있다. 영화를 보니 과연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게 이 영화의 방향성과도 핀트가 맞지 않을뿐더러 미술에 공을 들여온 최근 사극 영화의 흐름에 비추어 크게 변별력을 가질 정도도 못된다고 생각한다. (미술은 <스캔들>이 훨씬 더 훌륭했다.)

이 말은 미술이 훌륭해서 영화가 꽝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미술만 훌륭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미술에 한해 면죄부를 줄 일도 아니다. 나는 왜 한국의 사극은 늘 화려하고 세련된 복식과 세트를 강조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16세기 조선의 민초들, 그 가운데 화적떼 두목으로 나오는 유지태는, 그 시대에도 치아 미백과 스포츠센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SF적 가정을 얼굴과 몸으로 웅변한다. 민중들은 갓 사우나에서 나온 듯 피부가 매끈하고, 옷도 깔끔하다. 손톱에 덕지 덕지 떼가 끼고, 이는 태어나서 한번도 양치질을 안한듯 누렇다 못해 시커먼, 잭 스패로우는 괜히 그렇게 묘사된 것일까? 떼구정물로 목욕을 한듯한 <킹덤 오브 헤븐>의 십자군들도 기억날 것이다. 똥과 진흙 투성이로 가득한 <여왕 마고>의 16세기 파리는 또 어떤가. 가까이는 <하나>의 꾸질꾸질한 빈민촌 사람들도 있다. 이런 디테일이, 화려한 비주얼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의 사극에는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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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마고> 1994, 파트리스 쉐로 감독, 이자벨 아자니 주연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시대극으로 기억되는 <여왕 마고>는 인물과 공간을 통한 시대성의 묘사 방식에 대한 나름의 정답을 제시한다. 별 게 아니다. 디테일에 충실할 것. 영화의 의도를 분명히 밀고 나갈  것.

<황진이>는, 봉건 제도의 모순에 직면한 백성의 저항을, 사대부의 입으로 지껄이고 있는 듯한 영화다. 그러다 보니 이 얘기를 하려다 저 얘기에 빠진다. 대사는 붕 떠 있고, 굳건한 의지가 실리지 않은 편집은 자주 길을 잃어 관객의 감정선을 뚝뚝 끊어 놓는다. 맥이 빠진다. 송혜교의 변신 하나 건지고 나오기엔 140분이 너무 길어 맥 빠지고, 초강력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적하기엔 포스가 형편 없어 맥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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