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전도연, 그후...

별별 이야기 2007.05.31 10:34 Posted by PD the ripper
며칠 전, 전도연에 관한 나의 글이 인터넷에서 '화제'(인터넷 매체 기자의 표현)가 됐단다. 덕분에, 오픈 한 지, 겨우 열흘을 넘긴 이 블로그는 그날 하루에만 방문자 10만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런, 세상에...

그러나, 나는 별로 기쁘지 않다. 아니, 당혹스럽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치, 교실에서 친구에게 수줍게 내민 일기장을 누군가 낚아 채, 큰 목소리로 줄줄 읽어 버렸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랄까.  

나 자신이 언론인이며, 지난 12년간 방송은 물론, 온갖 신문과 잡지를 통해, 말을 하고, 글을 써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험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내 글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인터넷 문화가 점점 더 무서워지더라.

'뉴스엔' 이라는 인터넷 매체는 '전도연 데뷔초 종합병원 출연 당시 신입PD 회고록 화제' 라는 기사를 포털사이트에 올리고, 누군가는 나의 글을 마치 자신의 글 인양 포장해, '낚시질'을 하시더라. 사실, 이 블로그는 오픈 블로그를 표방했으니, 이곳에 올려진 글은 당사자들의 허락없이 마음대로 퍼가도 괜찮다. 출처 표기만 해준다면야...

그러나, '뉴스엔'의 기사 만큼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뉴스엔' 기자는 글을 쓴 내게 그 어떤 확인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 언론인으로서, 나는 취재의 제1원칙이 '사실 확인'이라고 배웠다. 물론, 그 글은 내가 쓴 글이 맞고, 내용 역시,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임이 분명하니, 겉으로 보기에 '뉴스엔'의 기사는 '사실'에 근거한 기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만약, 그 글이 나를 사칭한 누군가에 의해 쓰여졌다면? 내용 역시, 특정한 목적을 위해 가공된 글이라면? 역사에 '만약'을 붙이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해도, '사실 확인'이라는 언론인의 기본 소양을 무시한 인터넷 매체의 '글'쓰기(기사의 기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니, 기사가 아니라 그냥 '글'이다)'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들의 취재 원칙은 '사실 확인'이 아니라, '속보성과 화제성'인 모양이다.

모 광고의 카피처럼, 인터넷은 필연적으로 '스피드'가 생명인 공간이다. 나 역시, 이 점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기본'을 망각한 '속도'는 필연적으로 '사고'를 부른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인터넷 문화는 바로 그 '속도' 때문에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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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가 맥 빠지는 이유

영화 이야기 2007.05.29 14:16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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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현 감독의 신작이자 송혜교의 변신이 주목된다던 <황진이>를 일반 시사를 통해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그다지 즐기지 못했다. 아닌 영화와 괜찮은 영화로 굳이 나눈다면, 요즘 한국영화에 대한 언론 일반의 응원과 호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머금고 이 영화는 아닌 쪽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강우석 감독이 기획한 시네마서비스 배급 영화들이 왜 자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정면 대결을 펼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아들> vs <스파이더맨 3>, <밀양> vs <캐리비안의 해적 3>, <황진이> vs <슈렉 3>- 용감해 보이는 게 아니라 무모해 보인다.)

우선, 장 감독은 왜 굳이 북한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확고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황진이와 관련한 역사 기록이 알려주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벽계수, 서경덕과 관련한 일화 등) 외에 노비 '놈이'와의 관계를 설정한 북한 소설의 의도는 비교적 자명하다. 기생과 노비라는 똑같이 천한 신분을 공유하는 두 명의 소외된 천재가 계급적 연대와 에로스라는 두 끈으로 묶인다. 신분제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봉건질서에 대한 인민의 저항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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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화는, 황진이의 기예와 기백에 초점을 맞춘 하지원의 TV 드라마 <황진이>에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소설로부터 받아 안은 시대성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해야 하는 부담을 안는다. 그 부담을 수행하는 방식이 '블랙의 반란'으로 묘사되는 황진이의 한복 패션쇼와 미술에 치중하는 것일까? 여러 평가들을 살펴보니, 대충 미술과 의상은 화려하다는 쪽에 쏠려 있다. 영화를 보니 과연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게 이 영화의 방향성과도 핀트가 맞지 않을뿐더러 미술에 공을 들여온 최근 사극 영화의 흐름에 비추어 크게 변별력을 가질 정도도 못된다고 생각한다. (미술은 <스캔들>이 훨씬 더 훌륭했다.)

이 말은 미술이 훌륭해서 영화가 꽝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미술만 훌륭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미술에 한해 면죄부를 줄 일도 아니다. 나는 왜 한국의 사극은 늘 화려하고 세련된 복식과 세트를 강조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16세기 조선의 민초들, 그 가운데 화적떼 두목으로 나오는 유지태는, 그 시대에도 치아 미백과 스포츠센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SF적 가정을 얼굴과 몸으로 웅변한다. 민중들은 갓 사우나에서 나온 듯 피부가 매끈하고, 옷도 깔끔하다. 손톱에 덕지 덕지 떼가 끼고, 이는 태어나서 한번도 양치질을 안한듯 누렇다 못해 시커먼, 잭 스패로우는 괜히 그렇게 묘사된 것일까? 떼구정물로 목욕을 한듯한 <킹덤 오브 헤븐>의 십자군들도 기억날 것이다. 똥과 진흙 투성이로 가득한 <여왕 마고>의 16세기 파리는 또 어떤가. 가까이는 <하나>의 꾸질꾸질한 빈민촌 사람들도 있다. 이런 디테일이, 화려한 비주얼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의 사극에는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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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마고> 1994, 파트리스 쉐로 감독, 이자벨 아자니 주연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시대극으로 기억되는 <여왕 마고>는 인물과 공간을 통한 시대성의 묘사 방식에 대한 나름의 정답을 제시한다. 별 게 아니다. 디테일에 충실할 것. 영화의 의도를 분명히 밀고 나갈  것.

<황진이>는, 봉건 제도의 모순에 직면한 백성의 저항을, 사대부의 입으로 지껄이고 있는 듯한 영화다. 그러다 보니 이 얘기를 하려다 저 얘기에 빠진다. 대사는 붕 떠 있고, 굳건한 의지가 실리지 않은 편집은 자주 길을 잃어 관객의 감정선을 뚝뚝 끊어 놓는다. 맥이 빠진다. 송혜교의 변신 하나 건지고 나오기엔 140분이 너무 길어 맥 빠지고, 초강력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적하기엔 포스가 형편 없어 맥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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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만 명이라는 첫 주말 관객수에 놀랄 일이 아니다. 스크린수를 보시라. 입이 쩍 벌어진다. <캐리비안의 해적 3  세상의 끝에서>, 개봉 스크린수가 무려 912개다. 개봉 당일 800개 넘는 선에서 출발했는데, 주말을 통과하며 이렇게까지 늘어난 것이다. <스파이더맨 3>가 개봉 당시 816개 스크린을 점유해 논란이 일었던 건 유도 아닌 셈이다. '그까이꺼 무슨 논란이나 돼?' 하는 듯 단숨에 기록을 경신해 버렸다. 무서운 기세다. 오금이 저린다.

지금 한국 극장가에선 한 영화가 어느 정도까지 스크린을 독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장 실험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한 영화가 1,0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하는 것도 먼 일이 아니다. 전국 스크린의 3분 2 이상에서 같은 영화를 틀고 있는 현상이 올 여름에 현실화할 가능성이 꽤 높아졌다.

자제력을 잃은 스크린 독과점 경쟁이 끝을 모르고 달려가고 있는데, 시장의 자율 조정 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택도 없는 공염불이 여전히 힘을 얻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스크린수를 법적 제도적으로 규제하지 않는데, 왜 하필 한국에서만 그게 필요하냐고 나부대신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영화만 보느라 사회 공부 게을리한 자들의 무식하기 짝이 없는 주장들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한 영화가 전국 스크린의 절반 이상을 상시적으로 꿀꺽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미국에서조차 <스파이더맨 3>가 불과 10% 정도의 스크린을 점유한 걸 놓고 독과점을 우려하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1940년대 말 반트러스트법 이후, 보이지 않는 독과점 견제 심리 때문이다.

한국에선 그런 견제 심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되는 영화에 몰아주기, 끝도 없는 무한 경쟁 뿐이다. 남게 될 결과는 뻔하다. 전국 극장의 할리우드 채널화. 1번과 2번 채널만 존재하는 완벽에 가까운 유통 독점이다.

주말 박스오피스(2007.05.25~27)

순위      작품              스크린수          서울주말           전국누계
==========================================================================
1.     캐리비안의 해적 3      912              474,600          2,713,300
2.       밀양                 266               73,300            350,000
3.      스파이더맨 3          290               31,100          4,830,100
4.     전설의 고향            202               29,700            240,500
5.       넥스트               140               22,000            402,000

#이 박스오피스 수치는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기자의 취재를 통해 확인된 스코어임을 밝힙니다.
#박스오피스 도표에 명기되지 않은 다른 영화의 흥행 성적이 궁금하신 분은, 댓글로 문의하시면 아는 한도 내에서 답변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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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전도연은...

별별 이야기 2007.05.27 12:10 Posted by PD the ripper
95년 봄, MBC 본사 D 스튜디오. 나는 본사에서 OJT중이었고, 당시, 최고의 인기 드라마 '종합병원'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이재룡, 김지수, 신은경, 구본승 등 신인과 다름없었던 배우들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바로 그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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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를 조금 넘긴 시간. 8평 남짓한 종합편집실에는 20여명의 스텝들이 온 신경을 집중하며 막바지 스튜디오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고, 피곤에 지친 수습사원은 출입구 옆 소파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하는 일 없이, 모니터만 쳐다보며 속절없이 기다리는 게 일과인 지라, 하염없이 감기려는 눈꺼플과 사투를 벌이던 그때였다.

비몽사몽을 오가던 어느 순간,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내 옆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내 옆에는 간호사복을 입은 전도연이 가슴에 손을 모은 채, 초조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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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늦게까지 이어지기 일쑤인 스튜디오 촬영 및 제작은 출연자와 스텝들이 동시에 마침표를 찍는 경우가 거의 없다. 출연자들은 자신의 출연 분량이 모두 끝나면, 자연스럽게 스튜디오를 빠져 나가고, 스텝들 역시 마찬가지다. 대충 퇴근순서를 보면, 고참 연기자(예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요즘은 스타 연기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나머지 출연자, 카메라 및 조명스텝, 제작스텝, 연출스텝. 이런 순서로 퇴근한다.

순서에서 알 수 있듯, 연출자의 지시가 없는 한, 출연자가 마지막까지 남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날은 전도연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분량이 모두 끝난 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종편실에서 제작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출자의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는 그때 모니터를 응시하던 전도연의 표정과 눈빛을 잊지 못한다. 자신과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묵묵히 지켜보며, 때로는 환호하고, 때로는 절망하던 그녀의 표정과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던 인상적인 눈빛.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작실의 스텝 누구도 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 나중에 조연출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유독 전도연만은 언제나 마지막까지 남아 편집과정을 지켜봤다고 한다. 맨날 보는 일이니, 다들 '그러려니' 하는 거 였다.

그날 이후, 드라마 '종합병원' 팀에서 연수를 받는 내내, 나는 종합편집실에서 전도연과 마주쳤다. 언제나 제작실 한 쪽 구석에서 간호사복을 입은 채, 감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주인공이었던 이재룡은 물론, 청순가련 김지수나, 상큼발랄 신은경, 하물며, 어리버리 구본승 마저도 스타 대접을 받았던 그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녀는 그렇게 묵묵히 성장하고 있었다. 12년이 지난 지금, 과연 누가 가장 빛나는 '별'인지를 생각해보면,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말이 더욱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내가 아는 한, '칸이 주목한 배우 전도연'은 결코 공짜로 얻은 타이틀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배우 전도연'에게 진심이 담긴 박수를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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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개봉했다. 네티즌 평점이란 걸 봤다. 6점대다. 앞서 개봉한 <못 말리는 결혼>이 7점대였는데, <밀양>이 그보다 낮다니, 잠시 할 말을 잃는다. 네티즌 평점이 많은 부분 조작되고, 또 그 때문에 신뢰성이 없다 하지만, 게다가 대중 관객의 반응을 수치화해 보여준다는 게 얼마나 덧없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싶다. 차라리 너무해서 흥미롭다.

들여다 봤더니 대중 관객의 호오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영화도 오랜만이지, 싶다. 맥락은 완전히 다르지만 아마도 <한반도> 이후 처음인 것 같다. 1점대를 준 사람들의 평을 대충 살펴 봤다. 대체로 '종교적인 코드'가 포함돼 있다는 게 거부감의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전도연이 연기한 신애라는 인물이 아들을 잃은 뒤, 종교에 의해 위안 받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는 부분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분들, 영화를 오독해도 심각하게 오독했다. <밀양>은 종교를 끌어 들였지만 다분히 비판적,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로 대변되는 현실 기독교에 대한 꼬집기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의도가 이렇게 정 반대로 오독될 수 있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 조차 감독 이창동의 패착일까. 아니다. 오독하는 관객들의 무딘 감수성이 문제다. 대중의 시선은 절대선이 아니다. 대중이 항상 참이었다면, 드레퓌스 사건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미국에서 부시가 집권할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폄훼한 익명의 평점 권력이여, 이미 평론가들보다 더 강력한 위세를 떨치고 있음에도 심심하면 평론가가 쇼호스트인 척 하지 않는다고 두들겨 패며 포퓰리즘의 우위를 확인하는 시장 추종적 대중 권력이여, 영화를 탓할 게 아니라 무뎌진 감수성을 돌보시라. 그리고 영화를 재미라는 단 한가지 잣대로 재단하는, 처연한 문화적 수준을 긍휼히 여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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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밀양,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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