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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감독의 출세작이자, 99년 개봉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주유소 습격사건>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작품이었다. <투캅스> 시리즈의 명맥을 이을, 한국형 코미디의 새로운 전성기를 예고했다는 점. 주연을 맡은 유지태, 이성재, 강성진 같은 배우들이 고루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특히 유오성의 잠재력이 발견됐다는 점.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사실상 영화 검열이 폐지되면서 한국영화의 소재와 표현의 영역이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증명했다는 점.

무엇보다 사회의 극단적 루저를 상징하는 네 명의 젊은이가 '그냥' 주유소를 털게 되면서 벌어지는 하룻밤 사이의 해프닝을 통해 이 사회의 문제점을 고루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로서의 성취를 이뤘다는 점은 관객 뿐 아니라 비평가들의 주목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주유소라는 공간이 주는 상징성, 젊은이들의 저임금 중노동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후안무치하기까지 한 사장(박영규)의 캐릭터 묘사는, 이 재기발랄한 블랙코미디가 현실성과 통쾌함을 동시에 확보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전편이 지닌 이런 의미심장함에도 불구하고, <주유소 습격 사건>이 개봉된 지 무려 10년이나 지나 속편이 만들어진다고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과연 속편이 <주유소 습격 사건>이 소화됐을 당시만큼의 정서적 교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강산도 변하는 시간 동안, 관객들의 트렌드와 하물며 시대 정신도 바뀌었을 텐데 말이다. 자칫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으니 출세작을 한번 더 욹어 먹으려는 심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위험성을 안고 있기도 하다.

김상진 감독은 분명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흐른 시간만큼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하면 지금의 관객들에게도 통하는 지점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5년 전 아들을 잃고 연기 생활을 사실상 접었던 박영규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박영규에 대한 오마주에 가까울 정도로, 전편과 똑같은 악질 사장을 연기한 그의 비중은 다른 주연들을 압도할 정도로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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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이 처들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라면, 속편은 지키는 자들의 이야기다. 폭주족의 주유소 침탈에 골머리를 앓던 사장은, 무술 유단자 네 명을 주유원으로 고용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그러나 사장의 막돼먹은 행태에 불만을 품은 이들 네명은, 어느새 사장을 감금해 버리고, 기름을 반값에 팔아 밀린 월급을 해결하려 든다. 여기에 막 수송차를 강탈한 탈주범들과 폭주족들이 얽히고 설키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전편의 상황을 살짝 꼬아 놓은 것을 빼면, 주요 캐릭터의 배치나 갈등 관계, 점층하는 폭력의 향연은 전반적으로 대동소이하다. 대동소이하다는 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전편이 제시했던 신선함과 꽤 밀도 높았던 긴장감이 증발돼 버려 아쉽다는 얘기다. 그건 10년이나 지나 만들어진 속편의 한계일 수도 있고, 김상진 감독의 코미디 감각이 무뎌진 탓일 수도 있다.

우선 <주유소 습격사건>의 풍자적 설정이, 물론 청년 백수들이 넘쳐나는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긴 하되, 지키는 자에서 빼앗는 자로 전환되는 상황의 극적 설득력이 약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동기 부여 과정이 약하다. 게다가 박영규에 대한 지나친 배려는, 다른 캐릭터 묘사의 심도와 전체 플롯의 균형을 깨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그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영화 속 사장처럼 박영규는 다른 배우들이 충분히 입체감을 확보할 수 있을만큼의 시간을 빼앗고 있는 아이러니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그를 진정으로 배려했다면, 더 짜임새 있는 드라마 안에서 그의 캐릭터를 제대로 대우하는 것이어야 했다고 본다.

대중 영화로서, 그것도 코미디로서, 객석에서 폭소가 자주 나오지 않는다는 건, 치명적인 허점이다. 시사회에서 내 바로 옆좌석에서 <주유소 습격 사건 2>을 본 한 개그맨은 시종 일관 한번도 웃지 않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1월 2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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