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과 투명 괴물

별별 이야기 2009. 12. 6. 20:34 Posted by cinemAgora

어디선가 이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인터넷 공간은 보고 싶은 모든 정보를 찾아 볼 권리도 줬지만 동시에 보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보게 될 의무도 선사했다." 사실이다. 눈 감고 귀 막지 않는 이상, 별로 내키지 않는 정보에도 노출돼야 하고, 동의하지 않는 주장도 눈에 들어온다.

이런 상황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인터넷 공간을 개탄한다. 악플 세례를 보며,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잔인해지는 건지 모르겠다고 혀를 차고, 거꾸로 스스로 결코 악플러라고 믿지 않을 게 분명한 악플러들은 같지도 않은 것들이 인터넷 공간을 틈타 잘난 척 할 수 있는 멍석을 만났다고 냉소한다.

어쩌면 이것은 인터넷의 특수성 때문에 생긴 착시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간혹 한다. 여기서 인터넷의 특수성이라 함은, 만인의 목소리가 계층을 나눌 필요 없이 등가로 취급된다는 점이며, 착시 현상이라 함은, 그로 인해 지금까지 수면 아래 가라 앉아 보이지 않던 실재가 훨씬 더 부풀려져 크게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곧잘 자신만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하며 목소리를 키워야 이긴다는 생활 법칙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시장통엔 예의 악다구니가 넘쳤고, 폭력은 일상적으로 빈번했다. 하지만 이런 분노와 저주의 에너지는 오로지 그 주변의 1,2차 집단 내에서만 분출되고 배설됐다.

인터넷은 이 에너지가 불특정 다수를 향해 해소될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키보드 워리어를 양산했다. 하지만 인터넷이 이들에게 어둑한 골방의 키보드를 내준 것을 빼면, 재수 없고 엿같은 세상을 경멸하고, 나보다 잘난 이들을 질시하며, 풀리는 것 하나 없는 일상을 지루해 하는, 증오와 불만, 저주의 총량이 커졌다고 보진 않는다.

인터넷 때문에 딱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보다 약한 이를 향했던 폭력의 물꼬가 익명성을 무기로 상향으로도 가능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대체로 법과 제도의 위력을 가늠하지 못해, 당장 고소라도 할 제스처를 취하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잘못했다고 사과하기 일쑤다.  

하여 나는, 인터넷 공간의 잔혹성에 대한 모든 논란이 필연적으로 수박 겉핥는 일이라는 믿음에 변함이 없다. 더 잔인한 것은 사람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내모는 투명 괴물이다. 그 투명 괴물은, 365일 꼬박 12시간의 중노동을 감내하며 발버둥 쳐도 눈에 잡히지 않는 내 집 마련의 꿈이자, 시도 때도 없는 임금 체불과 계약 만료 이후의 생계에 대한 불안이며, 우중중한 일상 너머 럭셔리한 삶이 손에 잡힐 거리에 있다고 뻐겨대는 찬란한 매체들의 사기다. 파편화된 경쟁의 룰을 내면화한 채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반지하 인생들의 한숨이며, 그 한숨을 세대간 착취 담론으로 단순화한, 설익은 지성이다.

이런 불합리와 부조리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이젠 어찌 할 도리가 없으니 눈이라도 맑아 보자는 심산으로, 인터넷을 정화하는 것으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맑아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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