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시절' 시류를 거스르는 사랑

영화 이야기 2009. 10. 19. 09:00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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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부터 주야장천 멜로만 찍어온 허진호 감독이 이번에는 꽤 인터내셔널한 멜로 한 편을 들고 나왔다. 한국인 선남(정우성)과 중국인 선녀(고원원)의 사랑이다. 배경은 쓰촨 대지진이 일어났던 청두이고, 지진으로 인한 상처가 이들의 사랑에 개입한다.

사실 모든 종류의 사랑이 당사자에겐 각별하지만, 3자의 눈에는 전형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유학 시절 잠깐 사랑의 불장난을 저지를까 말까, 했던 두 사람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다시 우연히 만나, 그 사랑이 진짜였을지를 가늠해 보며, 또 다른 사랑의 씨앗을 심을까 말까 망설이는, 이 영화 속의 과정도, 그러므로 굉장히 전형적이다. 게다가 매우 허진호스럽게도, 남자주인공은 그다지 진취적이지 않고, 여자 주인공은 예의 우물쭈물한다. (허진호 영화를 통틀어 가장 진취적이었던 캐릭터는 <행복>의 은희(임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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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에서의 그 유명한 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가 말해주듯, 허진호 멜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어가 있다면, ‘시간과 환경 앞에 무력한 사랑의 유한성이라고, 나는 본다. 허진호는 그 안에서 공감할 수 있는 애틋함을 추출해 낸다. 모든 사랑이 변하고, 어떤 사랑은 초월할 수 없는 걸림돌로 인해 당사자들을 고통의 나락에 빠뜨린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사랑은 슬픈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사랑에 국경이 있더라는 김상호의 대사를 빌어, 다가서려 하지만 다가설 수 없는 무형의 장벽을 설치한 뒤, 서로에게 끌리는 두 남녀의 우물쭈물 러브 스토리를 지켜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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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은 그러나, 허진호 감독의 작품 가운데 어쩌면 가장 밝은 영화일 것이다. 쓰촨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상처에 대한 치유로서 제시된 사랑이기에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대지진의 악몽은 드러나지만 잠복해 있고, 오히려 두 사람의 달콤한 데이트 동선을 따라가며 뽀얗고 아름다운 설렘의 기운을 포착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대신, 그 치유로서의 사랑을 따라가는 호흡은 과연 허진호적인 것이어서, 앞서 말했듯, 느리고 답답하다.

이것은 드라마의 굴곡이 분명한 기존 멜로 영화와 선을 긋는 허진호 감독 특유의 브랜드이긴 하되, 분명히 시류를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관객들이 통속 멜로로부터 기대하는 그 감정, 그러니까 두 주인공의 애틋한 사연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눈물이 핑 돌게 만들지 않는다. 누구도 죽지 않고, 게다가 그의 영화에서는 드물게도 남자 주인공이 울지 않는다. 두 남녀를 갈라 놓는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드러난 진실 앞에서의 망설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사흘간 청두에서 벌어지는 남녀 주인공의 심리 안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나는 거꾸로 이것이 <호우시절>을 이루는 어떤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성으로으로서의 사랑을 가장 보편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기. 외형적 사건이 아닌 심리적 사건으로서의 사랑.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흥행을 견인하지 못하는 패착이 될 수도 있다고 분석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여자 주인공은 멜로 영화의 타깃 관객들로선 감정이입이 어려운 외국인이고, 정우성의 허우대는 중국에 출장온 유학파 엘리트 사원하고는 왠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허진호는 늘,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들(심은하, 이영애, 손예진, 임수정, 그리고 고원원)을 모셔 놓고, 남자 입장에서 그들을 어루만지거나 핍박하는 과정에서 애와 증이 교차하는 사랑의 보편적 풍경을 담아낸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닌,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이지 않은 허진호 영화의 바로 그 내적인 모순은, 그의 영화와 멜로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요구 사이에 놓인 모순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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