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역사를 얼마나 제대로 재연할 수 있을까. 역사적 진실에 얼마만큼이나 다가갈 수 있을까. 나치의 유태인 학살 참극을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1955)로 기록한 바 있는 알렝 레네부터 이런 고민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끊임 없이 괴롭혀온 화두였다. 기획자가 취사 선택한 자료의 한계를 비롯해 연출자의 개입과 카메라 프레임의 한정된 인식 공간에 가둔 역사는 불가피하게 훼손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영화는 결코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회의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대중매체로서의 영화가 역사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화 매체의 한계 속에서도 최대한 역사적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어떤 이들은 제작자의 성찰을 요구했으며, 어떤 이들은 객관적 거리 두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기록영화가 아닌, 필연적으로 재연의 장치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 극영화의 경우, 이런 미덕은 실현성으로부터 멀어지기 일쑤다. 극 영화의 필수 요건인 내러티브와 스펙터클의 유혹을 극복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광주민중항쟁을 재연했던 <화려한 휴가> 같은 영화가 바로 그런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주는 경우다. 시니컬한 이들은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감정과 스펙터클을 서비스 하는 데 매진하느라 정작 역사적 진실에 대한 각성 효과는 증발시켰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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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작은 연못>은 어떨까. 이 영화는 역사적 진실에 어떤 접근법을 선보이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꽤 오래 전에 기획됐던 이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수백 명의 피난민이 인민군도 아닌, 남한의 우방 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던 이른바 노근리 사건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연극 연출가 출신으로 <비언소> <늘근 도둑 이야기> 등 사회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연극을 선보인 바 있는 이상우 감독은, 자신의 첫 영화 연출작 <작은 연못>의 초반을 자못 연극적인 상황으로 이끈다. 한달 전에 발발한 전쟁의 여파가 아직 미치지 않은 평화로운 농촌 마을. 동네 어르신들이 바둑을 두고 있는 대문 바위 앞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교차하며 평범하기 그지 없는 촌부들의 일상이 묘사된다. 감독은 어떤 인물에게도 치중하지 않은 채, 이들 갑남을녀의 평화로운 한 때를 강조함으로써, 거꾸로 뒤이을 참극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이어 일본인을 대동한 미군이 확성기를 통해 한국어도 아닌 일본어로, “곧 마을이 전투에서 벌어지니 마을을 떠나라는 소개 명령을 내린다. 영문도 모른 채 정처 없는 피난 길에 오른 마을 사람들. 트럭을 내주겠다던 미군은 작전에 방해가 된다며 자주 이들을 길 밖으로 내몬다. 결국 철로 위를 걷던 수 백의 피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폭격과 기관총 세례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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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극을 재연하는 이상우 감독은, 마치 바로 이것이 전쟁이다라는 듯, 참혹한 살육의 현장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영문도 모른 채 미군의 총알 받이 신세가 된 피난민들의 피와 살이 튄다. 절규와 아수라장. 같은 편에 의해 무참히 도륙되는 상황이 주는 어리둥절함. 그리고 실낱 같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쉴 틈 없이 교차한다.

극영화 전개의 필수 요건인 캐릭터와 그들을 둘러싼 구구절절한 사연을 소개할 틈이 없다. 거기에는 그냥, 어쩌면 우리의 할아버지나 할머니, 아버지나 어머니일 수도 있는 양민들이 "그 어떤 피난민도 전선을 넘을 수 없다"는 미군의 방침에 의해 아무 죄없이 죽고 있을 뿐이다.

내게 이 영화는, 차라리 감독의 몸부림처럼 보였다. 전쟁을 오락적 볼거리로 소환해야만 존재 가치를 갖는 전쟁 영화의 아이러니를 거부하려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재연으로서의 한계를 껴안아야 하는, 그리하여 끝내 역사적 진실에 당도할 수 없으며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제대로 위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괴감.

잠시 총성이 멎은 노근리 하늘 위로, 고래가 난다. 어미와 새끼로 보이는 한 쌍의 고래가 이 이해할 수 없는 살육의 현장 위를 평화롭게 부유하다 사라진다. 어쩌면 이런 초현실적 설정을 첨가한 감독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닐까.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이 초현실이며, 이것을 온전히 재연하려는 의도도 어쩌면 초현실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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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연못>은 역사적 진실에 대한 겸손한 응시를 통해 살아 남은 자들이 그 희생자들을 향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작은 연못>의 미덕이 충분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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